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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 서문

통융 2020. 9. 10. 21:10

傳心法要

 

序門

 

黃蘗山斷際禪師傳心法要 河東唐裵休集幷序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 하동당배휴집병서

 

황벽스님 황벽스님하지만, 황벽스님이 사셨던 산 이름이죠. 워낙 출중한 분이 사시다보니 산 이름이 단제선사 황벽스님의 호가 되었습니다. 전심법요란? 心法을 전하는 요점. 마음의 도리와 이치를 공부하는 요점. 또 당배휴집- 당나라 배휴가 모았다. 하동배휴집병서- 하동지방에 자사로 와 있으면서 만났기 때문에, 스님 법문하는 것을 일일이 적고 다시 책을 낼 때, 배휴가 서문까지 쓰셨습니다.

 

또 이 분은 화엄경에도 밝아서 청량스님하고 인연이 있으셔서 큰스님들의 저술에 서문을 많이 썼습니다. 당시에 워낙 권위 있는 분이라. 이 분의 서문을 받으면 책이 인정을 받는 택이 된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서문 꼭 받습니다. 전 책을 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말든지 서문을 하나도 받지 않고 혼자 서문 다 썼습니다. 큰스님 서문 붙어 있지 않다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뜻이 좋으면 보고, 뜻이 좋지 않으면 보지 말라는 거죠. 어떤 분들 책 낸 것을 보면 격려사, 서문, 추천사 등등 5~6장 앞에 쭉 붙어 있는 것 많이 보죠.

 

有大禪師하야 法諱는 希運이라

유대선사 법휘 희운

선의 종장 참선의 큰 스승이 계셨으며 존경스럽게 받드는 법휘는 희운이시고,

 

유대선사하야- 여기에 큰 선의 종장 참선으로 큰 스승이 계셨다. 법희는 휘운이다. 꺼릴 諱휘 자입니다. 휘자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거라 해서 휘자를 붙인 겁니다. 나중에 왕이 내리는 이름을 시어라 하고, 이런 것은 도반이상 되는 사람은 부를 수 있지만, 그 이외 사람들은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본래 이름이 황벽산 희운인데, 밑에 사람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법휘 희운선사라 붙여서 부릅니다.

 

 

住洪州高安縣黃檗山축峰下하니

주홍주고안현황벽산축봉하

홍주 고안현 황벽산 축봉 기슭에 머무셨다.

 

홍주라고 하는 지명으로 고안현 황벽산 축봉 아래에 머물렀다. 大安精舍라고 하는 절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乃曹谿六祖之嫡孫이요

내조계육조지적손

스님은 조계육조의 적손이요

 

조계육조의 적손이요. 조계육조스님의 정맥을 이어온 적자다는 말입니다.

 

百丈之子며 西堂之法姪이니라

백장지자 서당지법질

백장의 제자이시며 서당의 조카이시다.

 

백장의 바로 밑에 제자며 서당의 법질이다. 마조도일스님 밑에 백장스님의 사제로써 백장스님과 서당스님. 마조스님 밑에 무수도인이 있었다고 했지요. 많은 스님 가운데 백장스님이 있고, 유명한 서당지장스님의 조카다는 말입니다. 족보는 이렇게 밝혀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통을 중요시 여겨야지. 첫째는 법이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큰소리치는 것이 아닌 전통적으로 법을 제대로 계승한 분이다.

 

獨佩最上乘離文字之印하고 唯傳一心이요更無別法이니

독패최상승이문자지인 유전일심 갱무별법

 

스님께서는 심원하신 근사한 도장을 홀로 차고 최상승의 법문으로 문자가 없는 법을 설하시고, 오직 한 마음만 전해 가르치고 그 외 법은 일체 없나니.

 

전통은 그런데 법은 어떠냐? 독패 - 근사한 도장을 홀로 차고 있다. 무슨 도장이냐! 최상승 도장 - 가장 심원하고 가장 높고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가르침의 도장인데, 이문자지인 아무런 문자가 없는 도장입니다. 이런 도장을 홀로 차고, 앞에서 설명했던 유전일심 갱무별법-‘오직 한 마음만 전해가지고 한마음만 가르치고, 그 외에 다른 법은 일체 없나니’ 이라. 이게 전심법요의 종지며, 가장 중심 되는 근본 취지. 傳자는 여러 가지의 뜻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공부한다면 공부하는 뜻이 되고, 가르치는 입장이면 가르치는 뜻이 됩니다. 경 읽고 기도하고 참선하며 제지내라는 이런 말 하나도 없어요.

 

心體亦空이라

심체역공

심체의 근원은 공성이라

 

일심하지만, 일심이라는 게 어디 존재하는 건가요. 컵이나 마이크나 책상이나 주머니나 이런 것 같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체역공- 심체도 또한 공한 것이다. 그렇다고 없는 거냐하면 너무 크게 있어요. 너무 크게 있으면서도 공이야 역공이야. 공성- 우리 마음과 본질은 공의 성품입니다. 그러면서 너무 크게 있고요. 마음 때문에 마음의 무게가 너무 짓눌려 감당을 하지 못하잖아요. 마음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아파서 위장병. 신경과민. 스트레스도 걸리고 하잖아요 마음 병입니다. 없으면서도 작용을 다 하고 있는 게 공성입니다.

 

그래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겁니다. 공한데 묘하게 있어요. 묘하게 있으면서 또한 공해요.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 사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대육신의 인연의 힘이 조금 남아 있으니, 말도 하고 그렇지 있는 힘 다하면 금방 없어지고 맙니다. 항상 있으리라고 믿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부터가 그렇고 여러분들도 서로서로가 다 똑같습니다.

 

근래에 범어사에 스님들이 몇 분 돌아가셨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스님 어떻게 해서 갔다고 십년을 같이 산 사람이 가도, 아프다고 하더니 갔다고 합니다. 내가 가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러니까 가슴이 서늘해 지더라구요.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말하듯이 내가 갔을 때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 그 사람 아파서 몇 년 고생하면서 중국도 몇 번 왔다갔다하며 치료하더니 갔네요. 이겁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그 사람 아프다더니 갔네. 언제 갔는고. 장례는 지냈는가? 49제는 지냈는가?

이러면 끝이고요.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내 인생 무게를 혼자 짊어졌을 때는 이 우주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크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가벼운 겁니다. 십년을 같이 산 사람이 갔는데, 뒷방에 앉아서 그 스님 아프다더니 갔대. 어디 한번 우리 가서 얼굴이나 보자고 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갔을 때도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보다 하나 다를 바 없는 겁니다. 다를 이유가 뭐가 있어요. 아무 다를 것이 없는 거죠. 내가 가도 옆방에 남아 있는 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끝일 겁니다. 인생사가 그런 겁니다. 무겁게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면 이게 우주보다도 더 큰 게 인생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텅 비어 본래부터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심체역공이고 공성입니다. 마음만 공한 것이 아니고, 물질은 더 공합니다.

미운감정 사랑하는 감정 보이지는 않지만 얼마나 크게 작용합니까? 아주 크게 작용합니다. 마음과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 생명이 그렇고, 우리 육신이 그렇습니다.

 

萬緣이 俱寂하야

만연 구적

만연(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함께 고요하고

 

온갖 인연들이 밖에 나타난 현상. 심체는 이제 안이라면, 만연은 밖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함께 다 고요해요. 마음만 공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상도 공하다는 것이죠. 위에 설명한 것이 그런 내용입니다. 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있기도 해요. 또 너무 크게 있어요.

 

 

如大日輪이 昇虛空中하야

여대일륜 승허공중

큰 태양이 허공중에 떠올라

 

여대일륜!이 마치 큰 태양이 승허공중!에 저 허공중에 올라 지금 떠 있잖아요. 얼마나 큰 태양이 요즘 내리쬐는지 말도 못하죠. 큰 태양이 허공중에 떠,

 

光明이 照曜하야 淨無纖埃니라

광명 조요 정무섬애

환하게 비춰서 티끌하나 먼지하나 없는 것이 우리 마음과 같다는 겁니다.

 

광명이 조요라. 광명조요는 광명 좋긴 하나 너무 뜨거워 광명이 환하게 비춰 정무서면이라 너무 깨끗해서 티 한점 없다. 태양을 두고 할리 없이 뭘 설명하겠어요. 우리의 마음을 두고 하는 거지요. 환하게 더운 것이 태양보다도 더 밝은 겁니다. 더 밝으니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 태양보다도 더 밝으니 그런 겁니다. 이 물건이 얼마나 신기한 물건이지 모릅니다.

 

차안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한참 가다보면 옷 이렇게 가볍게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춥지 않은가? 나는 추운데, 차타고 에어컨 틀고 가면서 그런 착각에 빠질 때가 있어요.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능력이 참 신기한 것입니다. 심법! 마음의 도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대목이니까 이건 아무리 공부해도 부족함이 넘치지 않아요. 왜냐. 일체 근본이고 중심이고 내 인생 우주의 생명이기에 그렇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비유하자면 비유로도 만족할 것이 아니지만, 저 태양하고 같아서 환하게 비춰서 티끌하나 먼지하나 없는 것이 우리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이 그와 같아서 조금만 싫은 소리하면 그냥 토라지고, 좋은 소리하면 헤헤하면서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태양은 우리처럼 못해요. 태양은 우리 마음보다 조금 모자라요.

 

證之者는 無新舊無淺深하고

증지자 무신구무천심

깨달은 사람은 새것과 옛것도 없으며 깊고 얕음도 없고

 

증지자는 무신구무천심하고! 황벽스님은 이것을 증명하고 알아냈어요. 증득하자는 깨닫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新舊도 없고, 깨닫고 나면 새것이다 옛것이다 어제다 오늘이다 이건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淺深도 없고, 깊고 얕음도 없어요.

 

說之者는 不立義解하며

설지자 불립의해

설명하는 사람은 의해(논리적으로 알음알이로 사고를 깊이하고 생각을 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를 세우지 않으며

 

이것을 설명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불립의해라. 義解를 세우지 않는다. 그러니 증지자!는 깨닫고 나면, 오늘이다 내일이다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얕다 깊다도 없으며 깨닫지 못했으니 옛날이 어떻고 지금이 어떠며 그렇지요. 제대로 내 살림살이가 되면 그런 것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내 것이니까요. 그 다음에 이것을 설명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不立義解라! 의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알음알이로 사고를 깊이해서 생각을 해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바로 즉석에서, 황벽스님이 임제스님께 어떻게 보였지요. 三度發問 三度被打 했잖아요. 세 번 물었는데 세 번 맞았지요. 물을 때마다 후려쳤지 거기에 마음이 어떤 것이고, 뭘 물었어요. 佛法的的大意를 물었는데, 불법은 어떤 것이고, 석가모니는 어떤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義解라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의해입니다. 그냥 손가락을 들어 보이든지 꽃을 들어 보이든지, 후려쳐서 보이든지 바로 우주의 중심 우주의 주인을 들어 보인 거죠.

 

不立宗主하며 不開戶牖하야

불립종주 불개호유

 

으뜸되는 것을 세우지 않으며, 문(온갖 방편의 문이 있어야 문을 열지, 문을 열지 않는다는 뜻은 문이 없고 열문이 없다는 뜻) 을 열지 않으며

 

不立宗主여! 으뜸되는 것도 세우지도 않으며, 不開戶牖여! 으뜸이 무엇이고 지엽이 무엇이다는 것도 없죠.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이 아니고, 차별과 분별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불개호유여! 문도 열지 않아요. 문도 있을 수도 없는 겁니다. 따로 마음으로 찾아들어가는 戶牖라고 하는 것은 창戶호 창유牖자인데, 무슨 참선을 해야 들어간다. 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주문을 해야 들어간다는 것이 여기에 없다는 겁니다. 통체 온 우주가 그것인데 무엇을 찾아들어가고 하지. 방안에 있는 것이라야 문을 열고 찾아 들어갈 텐데, 방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안이고 방밖이고 온통 그것뿐이기에 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통 그것뿐이기에 주인도 없고 객도 없는 것입니다. 종주가 없어요. 종주를 세우지 않는다게 그 뜻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는 것이라.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으며 또 주인이니 나그네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 온통 그것 하나 한마음 하나이기에 그렇습니다.

‘유전일심 갱무별법(唯傳一心 更無別法)’ 했잖아요. 알고 보면 그렇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런 살림살이가 못되니, 차별하고 나눠놓고 순서를 가리고 육바라밀을 닦아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점차적으로 올라간다. 온갖 주문과 절을 한다. 온갖 방편 문이 많아요.

不開戶牖란 말은 이런 온갖 방편 문이 싹없어 지는 겁니다. 문이 있어야 문을 열지, 문을 열지 않는다는 뜻은 문이 없고 열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인과 객, 높고 낮음을 알고 보니 나눌 수가 없습니다. 통째로 한 덩어리입니다. 전단나무를 가지고 불상을 조각하는데, 삐져나온 것도 전단향기가 나고, 남아 있는 불상에서도 전단향이 나고 코나 머리에도 전단향이 납니다. 똑같이 자른 것에도 전단향이 납니다. 그와 같은 입장의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세하게 설명을 못해서 그렇지 그런 뜻입니다.

 

直下便是

직하편시

바로 이 순간 이 당체

 

직하편시라! 直下란 바로 이 순간 이 당체. 바로 이것이 그겁니다. 말하고 보고 듣는 것. 덥고 추운 것. 글씨를 쓰고 글을 보는 것. 이것이 당체 바로 直下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예요. 달리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입니다. 방편을 가세할 것도 없고, 올라 갈 것도 없고 내려 갈 것도 없습니다.

 

動念即乖니라

동념즉괴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느니라.

 

動念即乖라! 무엇을 알려고 일부러 육바라밀을 닦고 참선 염불 기도를 하고 절을 해서 얻어진다. 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 벌써 어긋나버려 생각을 움직이는 이 자체에 이 일심에 접근하려고 어떤 방편의 마음을 일으킬 때 곧 멀어져 버리고, 거리가 어긋난다.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나느니라.

 

然後 為本佛故로

연후 위본불고

그런 후에 본래불을 위한 고로

 

연후! 그런 뒤에 위본불고로! 본래불을 위한 고로 황벽스님은 그렇게 정신이 돼 있어요. 그 자리에서 살아요. 지금까지 설명한 動念即乖한 그런 가풍으로 살아요. 그러기 때문에 이 본래불 누구나 다 마음이 부처고 부처가 마음이고 하나도 움직일 것 없고, 털끝마치도 건드릴 것이 없는 본불입니다. 그런 본불을 위한 까닭에,

 

 

其言이 簡하며

기언 간

그 말이 간단하며

 

기언이 간하며! 그 말이 간단하며 제대로 알면 간단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손가락 하나 딱 세우면 그 속에 다 있으니까요. 그 표현 다 했으니까요. 부처님 팔만대장경 설명한 것이나 구지선사 손가락 세운 것이나 황벽스님이 임제스님께 세 번 후려친 것이 똑같다고요.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똑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간단하고,

 

其理直하고 其道峻하며

기리직 기도준

그 이치는 곧고 그 도는 고준하며

 

기리직이라! 그 이치는 너무너무 곧고 그 도는 높아요. 너무 간단하니 그 도는 고준한 거죠. 뭘 하라는 것이 많고, 육바라밀을 닦으라 하면 쉬울 텐데, 이건 너무 높아서 알아들으면 척 알아듣지만, 알아듣지 못하면 넘 높은 겁니다.

‘배휴!’ 하고 황벽스님이 불렀는데, ‘예’ 하니까. ‘어디 있느냐.’ 그렇게 했지, 아! 이거. 저만 해도 물으면 저 사진을 두고 누가 질문을 하면 아! 이건 황벽스님 사진인데, 스님은 당나라 때... 어쩌고저쩌고 쓸 때 없는 소리 틀림없이 할 겁니다. 절 안내하듯이 죽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설명하고 있을 텐데, 그래 안 해 그건 아무 쓰 잘 것 없는 거라고 안 해. 그렇지만 하근기는 그렇게 할 때 뭔가 조금 친근감이 나고 가까워지는 거죠.

 

其行하야

기행 고

그 행은 고고해

 

기행이 고라! 실체는 외로워. 뭐 지저분하게 해야 따른 사람도 많고 이야기가 되고 그럴 텐데, 보여 줄래야 보여 줄 것이 있어야지 . 일체가 그것으로 그 표현이니까 너무 고고해.

 

四方學徒 望山而趨하며

사방학도 망산이추

사방이 학도들이 산을 바라보고 나아가며

 

사방학도가 망산이추하며! 사방의 학도들이 산을 바라보듯이 말하자면 황벽산이니까. 산이 아니라 황벽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죠. 산을 바라보고 나아가고

 

睹相而悟하야

도상이오

그 황벽스님의 모습만 보고도 깨달아야

 

도상이오하야! 그 황벽스님의 모습만 보고도 깨달아요. 내 모양을 보고 이름을 듣는 이는 보리마음 모두 윤회고를 벗어나 저 아침 예불에는요 예불하고 나서 행선 축원할 때 ‘문화명자면산도 견아형자득해탈! 내 이름만 들어도 삼도의 고통을 면하고, 견아형자득해탈, 내 모습만 봐도 해탈을 얻어지이다.’ 스님들 예불문하고 나서 하는 이런 축원문이 있거든요.

이분은 도상이오라! 모습만 봐도 쓱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분은 체격이 크고 특이 했답니다. 이마에 육계상이 돋아 아주 특별한 얼굴이었다고 해요.

 

往來海眾 常千餘人이니라

왕래해중 상천여인

오고가는 바다 같은 대중들이 항상 천여인이니라

 

왕래해중이 상천여인이니라! 오고가는 바다 같은 대중들이 항상 천여인이나 됐다.

 

予會昌二年 廉于鍾陵할새

여회창이년 렴우종능

내가 회창(842년) 2년에 종능이라는 지방에 관찰사로 살피려 왔을 새,

 

여회창이년에! 내가 회창 2년에 회창은 연호(842년)로 서기로 842년에 염우종능할새! 종능이라는 지방의 관찰사로써 재임을 했을 때, 廉자는 재임을 했다는 뜻으로 살필 염인데, 종능이라는 지방을 관찰사로 살피려 왔을 새,

 

自山迎至州하야

자산영지주

황벽스님을 맞이해서 홍주에 이르러서

 

자산영지주하야! 황벽산으로부터 황벽스님을 맞이해서 지주! 홍주라고 州자는 홍주입니다. 황벽스님을 모시고 홍주에 이르러서 홍주에 왔다는 말입니다.

 

憩龍興寺하야 旦夕問道하고

게용흥사 단석문도

용흥사에 머물게 해서 아침저녁으로 도를 묻고,

 

게용흥사하야! 휴게라는 게자죠. 머물게 했다. 용흥사에 쉬게 해서, 조석문도하고! 아침저녁으로 가서 도를 물었습니다.

 

大中二年에 廉于宛陵할새

대중이년 염우완릉

대중이년(848년)에 완릉이라는 지방에 관찰사로 와 있을 새

 

대중이년에! 서기로 848년에 염우완릉! 완릉이라는 지방에 관찰사로 와 있었죠.

 

復去禮迎至所部하야 安居開元寺하야 旦夕受法하야 退而紀之하니

부거예영지소부 안거개원사 단석수법 퇴이기지

 

예로서 받들며 머무르는 곳에 모셔서 개원사에 스님을 안거로써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 물러나서 그것을 기록하니

 

부거예영지소부하야! 예로서 받들어서, 所部에 말하자면 자기가 머무르는 곳에 모셔서, 안거개원사하야! 개원사에 안거하게 했습니다. 개원사로 스님을 모셔서 이 당시 불교가 이러고저러고 해도 한 지역의 옛날 군주국가 시대에 도지사정도 되면 그 권위가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개원사에 안거하게 해서, 조석수법하야! 아침저녁으로 법을 받아서 퇴이기지하니! 물러나서 그것을 기록하니,

 

十得一二 佩為心印하고 不敢發揚이러니

십득일이 패위심인 불감발양

 

열개를 들었는데 하나둘만 기록으로 남기고, 마음도장에 새겨서 차고 지녀 보물처럼 감히 드러내지 아니하고

 

십득일이라! 열개를 들었는데 기록해서 남기는 것은 하나다 둘 정도로 십분의 일 이정도로라. 그래도 많이 기록한 거죠. 일 이정도만 기록을 했더라. 패위심인하고! 마음도장에 딱 새겨서 딱 지녀 차고서, 불감발양이러니! 이걸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세상에 드러내지 아니했어요. 감히 발행하지 아니했어요.

 

今恐入神精義 不聞於未來하야

금공입신정의 불문어미래

지금에 와서 염려가 되는 것은 미래 사람들이 듣지 못할까 염려가 되어

 

금공입신정의! 지금에 와서 염려가 되더라. 자기는 황벽스님께 들은 법문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염려가 하나 되더라. 입신정유가, 불문어미래하야! 내 정신세계에 들어 있는 그 아주 중요한 정밀한 뜻을 뒤 사람들이 듣지 못할까 그게 염려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근사한 법문을 미래의 사람들이 듣지를 못할까 염려가 되어,

 

遂出之하야 授門下僧大舟法建하야

수출지 수문하승대주법건

(메모한 것을)드디어 꺼내어 다시 정리하여 문하승 대주스님과 법건스님께 주어서

 

수출지라! 드디어 메모해 놓았던 것을 모두 꺼내어 다시 정리를 해서, 수문하승대주법건하야! 문하승 황벽스님의 제자 大舟스님하고 法建스님이라고 하는 두 사람에게 주었어요. 한 사람에게 주면, 가져가서 잘못될까 싶어서 두 사람을 불러서 노트를 건 내 준겁니다. 이것을 가져가서 큰스님들. 황벽스님 법석에서 바로 법을 들은 스님들이 있지 않냐. 가져가서 증명을 해라. 증거를 전부 검토를 해 오너라. 했어요.

 

歸舊山之廣唐寺하야 問長老法眾하야

귀구산지광당사 문장로법중

옛날 광당사에 돌아가서 장로들 큰스님들의 법의 대중들에게 물어서

 

 

귀구산지황당사하야! 옛날 광당사에 있었는데, 廣唐寺에 돌아가서, 문장로법중하야! 장로들 연세 많은 큰스님들 법의 대중들에게 물어서, 내가 황벽스님 법문 기록한 것이 올바른지 틀린지를 가서 물어라 그래서,

 

與往日常所親聞으로 同異如何也로라

여왕일상소친문 동이여하야

항상 친히 듣던 것으로 더불어 같고 다른 것이 어떤가를 증명하게 했다.

 

여왕일상소친문으로! 옛날에 항상 친히 듣던 것으로 더불어

동이여하야로다! 동이가 같고 다른 것이 어떤가를 친히 물어서 증명을 하게 했다는 그 말입니다.

 

이 법문 내용은 자기가 직접 들어서 기록했고, 그것을 다시 검토를 하고, 그 다음에 그 당시 직접 들었던 큰스님들께 가서 전부 검사를 받아서 비로소 이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됐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 책은 하나도 황벽스님의 정신과 사상에서 먼지하나 만치도 잘못됨이 없고 그대로 황벽스님의 법문이다. 내가 비록 기록은 했지마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기록을 했기 때문에, 황벽스님의 법문임을 증명하는 뜻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唐大中十一年十一月初八日序하노라

당대중십일년십일월초팔일서

 

당나라중십일년십일월초팔일서하노라! 857년 책을 내면서 서문을 쓰신 것이니까. 십일년십일월초팔일에 서문을 쓰노라. 이렇게 해서 서문을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큰스님들 당시에 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후배가 되어 후대에 살면서 참 이런 소중한 그런 법문의 연유를 보니까 감히 만날 수 없는 인연들. 배휴라든지. 황벽스님이라든지 황벽스님의 과거 스승으로부터 전래되어 온 거라든지 그 뛰어난 안목들을 지금 우리가 만나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어록이라 하는 것. 八萬大藏經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중한 공부를 하는 것이 지극히 즐거운 것은 옛날 선지들의 글을 공부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또 지극히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교육시키는 일만 같지 못하다. 이런 것을 교육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고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그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마음에 잘 새기시고, 소중한 인연으로 보통 값진 인연이 아닙니다. 어디서 황벽스님의 법문을 접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치 본인한테 재산이 되는 거지요.

 -- 무비스님 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