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방송 자료
<門열면 밝은 世上>
<門열면 밝은 世上>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반갑습니다. 대자비사 주지 통융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대화 할 주제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내용
사실 깨달음은- 각자가 알아차리고 체험하는 것이라 설명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체험과 설명을 통해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소승도 아직은 불법의 진리를 찾아 공부하는 수행자입니다만 그동안 제가 공부하면서 체험하고 느낀 경험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토론한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합니다.
깨달음에도 여러 수준이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전이나 논서에서 설명들을 하고 있는데, 소승도 그러한 것들을 참고해서 깨달음의 단계를 3문(門)으로 구분해서 설명을 드리고 있습니다.
3문은 체(體)와 상(相)과 용(用)으로 체공(體空). 상연(相緣), 용실(用實)문으로 구분해서 설명을 합니다.
물론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에 도달하는 수행 방법과 단계를 많은 경전과 논서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론>에서는 공가중(空假中)으로 <천태론>에서도 체상용 삼제원융(三諦圓融)으로 <기신론>에서는 1심2문3대 중에 3대를 體.相.用大로각 구분하여 진리를 설명하는데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방법도 유사한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에 실재를 체험하는 방법에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산을 등산 할 때 산 정상을 오르려면 여러 등산로가 있지만 도달하는 곳은 정상인 한곳에 도달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겠지요.
깨달음은 법(法)의 진리(眞理)를 알아차리고 쓰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그 진리의 본성(本性)인 실체(體)는 공(空)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상(相)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실상들이 연기(緣起)적 현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용(用)은 각각의 쓰임으로 평상심(平常心)인 중도(中道)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셋은 각각 구분해서 설명을 하지만 큰 하나로 나타납니다. 체(體) 속에 연기와 중도가 있고, 상(相) 속에 공과 중도가 있고, 용(用)속에도 체와 공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공이니, 연기니 중도니 하는 조금 어려운 단어들을 썼는데
이 셋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설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들이고
앞으로 깨달음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왜 깨달음을 얻으려 할까요,- 깨달음의 목적이 되겠지요? 깨달음의 목적은 괴로움을 벗어나 안심과 평화을 얻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전문용어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이고득락(離苦得樂)과 자비희사(慈悲喜捨)” 라고합니다.
이렇듯 깨달음이 부처님이 주신 우리 삶에 최고의 선물이고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안내 지도가 필요하고 그 안내지도를 따라 가면 목적지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안내지도는 경전이고 론서이며 깨달음을 경험한 선지식들의 어록 등이 되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깨달음의 입문이라 할 수 있는 첫번째 단계인 진리의 실체인 공(空)에 대한 체험과 함께 알아차림의 길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불교가 어럽다. 깨달음에 도달하기가 어럽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불교경전인 보물지도가 한문으로 되어 있고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서 한글세대 에게는 정말 렵습니다.
또한 안내하는 길잡이들이 어렵게 안내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전문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풀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저에게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가 시무외인 수인을 했다가 금강권인을 한다.>
이것이 깨달음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답입니다. 여러분은 이해를 하셨습니까? 왜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는데 손으로 폼을 잡았느야하면 깨달음을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진공묘유, 연기법, 열반적정, 즉여시, 무상정득각, 지혜와 자비 등) 하는 설명으로는 정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인 행동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손 법문은 부처님이 가장 많이 쓰신 법문입니다. 힘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부처님께 어떻게 귀의하면 되겠습니까?하면 이 수인을 쓰십니다.
<어렵고 힘든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이법문을 듣고 깨달아 행복하라>는 뜻인 ‘시무외인’이라는 손 법문입니다.
이 주먹은 ‘금강권인’인데 변하지 않는 단단한 금강석 같이 진리를 굳게 믿고 따르면 진리가 너희를 평화롭게 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이 깨달음의 진리’를 믿고 이 진리를 등불삼아서 너희 스스로 깨달아 평화로워지라는 선(禪)적인 법문입니다. 간화선의 화두(話頭)를 주셨던 것이지요...
깨달음은 설명으로 답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시무외인 수인을 했다가 금강권인을 한다.> 법문을 한 것입니다.
제가 깨달음을 보여 드렸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봤습니까?
깨달음을 알아차렸습니까? 아니면 제 손만 봤습니까?
,,,, 눈 밝으신 분들은 손금도 봤겠네요 ㅎ
* 비유를 들자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하는데 손을 본다는 격이지요.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수단이고 방편일 뿐이데 우리는 그 수단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내가 시무외인 수인을 했다가 금강권인을 한다.> 하는 것은 깨달음의 가리키는 순단이며 방편인 것입니다. 이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알고 싶어서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만
그런데 사실은 깨닫지 않고는 깨달은 후의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각자의 식견 만큼 이해 할 뿐입니다.
예전에 달에 가보지 않았을 때는 달에 대한 여러가지 상상으로 그럴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달을 정복하고 나니 의심이 없어지듯이 깨달음도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것은 모두가 깨달음이 아닌 자기 식대로 이해 일 뿐입니다.
* 깨달음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알아차림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가지고 이해 해 봅시다.
여기 사과가 하나 있다고 생각합시다.
이 사과의 맛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먹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말을 한다고 이 사과의 맛을 알았습니까?
아니지요. 생각으로는 실제 맛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사과의 맛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이 필요 없이 그냥 사과를 먹어보면 됩니다.
사과를 맛있게 여러분이 드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드신 사과의 맛이 어떻습니까?
사과의 맛은 ‘시다, 달다, 새콤달콤 ,시원하다느니’ 여러 가지 느끼는 맛을 설명 하십니다만 100%의 맛을 전달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설명을 듣고는 그 사과의 맛을 100% 느끼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저도 여러분과 같은 사과의 맛을 100% 느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먹어본 사과의 맛을 설명이 아닌 저에게 사과를 직접 먹게 하면 되겠지요.
말이 필요없지요.
여러분이 먹은 사과의 맛이랑 내가 먹은 사과의 맛을 똑 같이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말이 필요없이 그냥 마음으로 서로 알아차릴 뿐입니다.
모든 진리의 깨달음은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진리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이와 같아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방편일 뿐이지 진실 그자체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문자나 언어로는 진실을 밝힐 수 없다고 하지요.
어려운 전문 용어로는 불입문자(不立文字),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말을 합니다.
* 다시 한 번 깨달음의 결험을 해 볼가요.
<박수를 친다.> 다 같이 박수를 쳐 보십시요.
무엇이 이 소리를 만들었습니까?
지금 알아차렸습니까?
만약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으로 깨어 있다면 지금 제가 한 질문에 답을 하셨을 겁입니다.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이 지금 이 아닌 어디엔가 머물고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설명으로 이해 해 봅시다.
이 소리는 무엇이 만들었느냐?<박수를 친다.>
1, 당연히 내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막연하게 나라고 하지말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십시오?
2, 그러면 양 손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양손이 스스로 소리는 못내겠지요.
3,그럼 내 의지가 만들었다고요.
의지는 내 마음이고 생각인데 그럼 손을 그냥 두고
생각이나 의지로 손뼉을 쳐야지 하면서 생각 해 보십시요.
손뼉이 쳐 집니까?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 소리를 낼까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면 할 수 록 답은 멀어집니다.
왜냐면 생각으로는 소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인 마음으로 소리를 만들 수 없으면,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이 소리를 만들까?
결국 남은 것은 행동 밖에 없겠지요.
<박수를 친다.> 이렇게 박수를 쳐 보십시오.
오직 분별하려하지 말고 그냥 알차려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경허 스님의 제자인 만공스님이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을 뎅~ 치면서 그냥 그 소리에 확 깨달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스승인 경봉 스님께 편지를 씁니다.
이제사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단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요.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일어나는 작용성'입니다.<緣起性>
지나가 버린 과거나 오지도 않을 미래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숨 쉬고 살아있는 오직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의 공부고 수행입니다.
깨달음이란 뭔가를 많이 배우고 어떤 경지를 통과해서 얻는 거창 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앎과 수행은 당연히 따르겠지만요.
오직, 지금 여기서(now here) 일어나는 리얼리티(reality)가
내 삶의 100%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쓰는 삶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즉문즉답(卽問卽答)이라하고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손뼉을 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소리가 나게 하는 이 순간이 지금여기(now here)고,
작용이 일어나는 리얼리티(reality)는 소리입니다.
즉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림과 행동을 동시(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원성이 아닌 일원성)에 나타내 보십시오.
그냥 한번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손뼉을 쳐 보십시요.
이렇게요.<박수를 친다.> ......
어떤 설명이나 이론이 소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그냥 .... <박수를 친다.> 손뼉을 치면서 .....
이렇게 행할 뿐 입니다.
어떤 설명이 필요없이 그냥 말없이 이렇게 ...<박수를 친다.>
알아차림과 행동이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실지실견(悉知悉見)입니다. 연기적 작용성입니다.
* 다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박수를 친다.> ..... 이 소리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것이 깨어있는 지금 입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분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바로 일어나는 작용과 하나되는 것이 '진리의 실체'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진리의 실체가 나의 本性이고, 一念인 한 마음이고 중도(中道)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머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문다.'고 하면서 이 세상은 한 찰나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늘 변한다.
그래서 고정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인 중도'의 진리라고 합니다.
즉 깨달음이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머무는 것' 행하되 행함이 없이행한다. 쉽게 말하면 지금 순간순간을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생각에 끄달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전문 용어로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금강경, 제법(諸法)은 실상(實相)-법화경, 법성(法性)은 원융(圓融)-화엄경.>
이런 中道의 삶(깨달음의 삶)이 되면 마음이 평화롭고 내 이웃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행복하게 됩니다.
전문용어로는 일체중생은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으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이고득락, 자비희사,
참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는 언행이 일치합니다.
탐욕이 살아졌기 때문에 욕심이 없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늘 평화롭습니다.
연기실상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자비스러워서 누구나가 존경하게 되며 늘 가까이 사랑하고 자애롭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세상의 참 진리는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다가 소멸하기 때문에 혼자서 독립된 존재, 혹은 유일한 존재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데 그런 진리는 없습니다.
매 순간순간 적절한 진리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영원한 진리가 있다면 딱 하나
모든 존재는 너와 내가 하나이면서도 늘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늘 기억하시고 알아치리시길 빕니다.
오늘은 깨달음에 보석을 찾아가는 입문으로 진리의 실체인 공(空)의 여행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실지 체험으로 이해하고 느꼈다면 비로소 깨달음에 입문하는 것으로 공(空)을 이해 하신겁니다.
분별심을 내려놓고 늘 깨어있으면
생각이 명료해 집니다.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비로워집니다.
시무외인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