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촬요...경허선사
<선문촬요禪門撮要 >
조선 말기의 선승(禪僧) 경허(鏡虛)가 편찬한 우리나라 불교 선학(禪學)의 지침서.
2권 1책. 활자본. 상권은 1907년에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개간하여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옮겨 보관하였고, 하권은 1908년 범어사에서 개간하였다. 상권에는 중국 고승 찬술인 13편의 명제가 수록되어 있다.
「혈맥론(血脈論)」은 ‘달마대사설(達摩大師說)’이라고 하였으나 달마 이후에 된 글이며, 「관심론(觀心論)」도 ‘달마대사설’이라 하였으나 제6대 신수대사(神秀大師)의 저술이다.
「사행론(四行論)」은 제1 입도수행강요문(入道修行綱要門)부터 제44 수심제법유무문(隨心諸法有無門)까지 44장에 이르는 장문이다. 이 중 제1문은 달마의 설이고, 제2 이하는 후인의 부연이라는 것으로, 근래에 돈황에서 출토된 「사행론」에도 부록된 장권자(長卷子)의 장문(長文)이다.
「최상승론(最上乘論)」은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이다. 돈황 출토본 중에 「기주인화상도범취성오해탈종수심요론(蘄州忍和尙導凡趣聖悟解脫宗修心要論)」이 이것과 같은 것으로, 제목은 다르나 기주 인화상이 곧 홍인대사이며, 「수심요론」이 우리나라에서 「최상승론」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하권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과 「진심직설(眞心直說)」,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 수행자를 위한 보조국사의 저술을 비롯하여 천책(天頙)의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문보장록』의 상권은 선교대변문(禪敎對辨門)을 비롯한 25칙(則), 중권은 제강귀복문(諸講歸伏門) 등 25칙, 하권은 군신숭신문(君臣崇信門)·이바삼칙(尼婆三則)으로 되었다.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의 내용은 삼성장(三聖章)·이현화(二賢話)·산운편(山雲篇)·운문삼구(雲門三句) 등이 있고, 「선교석(禪敎釋)」을 수록하였다.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의 선승(禪僧)을 비롯한 연구가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 01. 불상에 예배하는 법
선문촬요(湖西 德崇山 滿空門人 惠菴 謹識)
불상에 예배하는 법
달마 조사께서도
불상에 예배하는 법에 대하여 누누(累累)히 말씀하신 바 있거
니와 산승이 거듭하여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첫째 :
불상에 예배할 때에
그 불상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한다.
어디서 온 것일까?
즉 각자 자기의 마음에서 나타난 그림자이다.
불상이 곧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불상이어서 둘이 아닌 것이다.
둘째 :
어떻게 예배하여야 되는가?
몸으로 불상에 예배하되
반드시 自己의 마음에다 예배할지언정
나타난 그림자인 등상불에게 만 공경심을 내어서는 안된다.
셋째 :
자기의 마음에다 예배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다 예배하라 하니
마음이란 형상도 없고 부피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에다 절을 하랴` 하겠지만,
『참선하는 선학자가 화두를 드는 의정 중에서
참구하던 화두를 잃지 않고
화두 바탕 위에 일어난 망념에 끄달리지 않으면
그것이 곧 마음에다 예배하는 것이 된다.』
마음밖에 있는 등상불에게 공경심을 내지 않으므
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참 부처님께 예배하는 참 예배가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눈앞에 나타난 형상만 따라 상에 착하여 절을 한다면
공덕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악도에 떨어질 인이 된다고
조사께서도 경고(警告)하신 바 있다.
또 아마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등
모든 불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사람들도
불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생각을 잃지 않고』 염불 예배하면
그것이 곧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께 예배하는 길이 된다.
따라서 기도(祈禱)를 하거나
혹은 주력(呪力) 간경등(看經等) 각종 행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한다면
그것은 곧 마음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큰 공덕이 된다.
위로는 불 보살 역대 조사 천하 선지식과 다생부모 시방시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사생육도의 침륜(沈淪)을 건지게
되리라.
이 법은 구참납자(久참衲子) 뿐 아니라
불문에 처음 들어온 신도까지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길로 믿고
조사의 혈맥론을 비롯한 몇 편의 선문어록을 인포(印布)캐
하는 바이니 공부하는 사중은 반드시 일독(一讀)
하기 바란다.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2. 마음밖에 불성(佛性)이 따로 없다.(心外無佛性)
Ⅰ. 달마 혈맥론.(達磨 血脈論)
마음밖에 불성(佛性)이 따로 없다.(心外無佛性)
삼계(三界)가 혼돈(混沌)하여 일어났으나
모두가 한 마음(一心)으로 돌아가나니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사
문자를 새우(의존)시지 않았느니라.
물음이라.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삼습니까?
대답이라.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니,
끝없는 옛부터 온갖 동작을 하는
모든 시각과 온갖 장소가 모두가 그대의 근본 마음이며,
모두가 그대의 근본 부처이니,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 함도 이와 같으니라.
이 마음을 제하고는 딴 부처를 찾을 수 없나니,
이 마음을 떠나서 불도와 열반을 구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제 성품(自性)은 진실해서 인(因)도 과(果)도 아니며,
또 법(法) 그대로가 마음이니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기의 마음이 곧 뚜렷이 밝고 고요히 비추는 열반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마음밖에 부처와 보리가 있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니라.
부처와 보리가 모두 어디에 있는고?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을 수 있겠는가?
허공이란 이름뿐이요
형상도 부피도 없나니, 잡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느니라.
이렇게 허공을 잡을 수 없는 것 같이,
이 마음을 제하고 부처를 찾는 것도 역시 끝내 찾지 못하리라.
부처란 ??
자기 마음으로 지어서 얻는것(佛是自心作得) 이어늘,
어찌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으리요?
앞 부처와 뒷 부처가 다만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라,(佛卽是心)
마음 밖(心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佛外)에 마음이 없다.
마음 밖(心外)에 부처가 있다고 할진댄 부처가 어디 있던가?
마음 밖(心外)에 부처가 없다면 어찌 부처라는 소견을 일으
키리요, 서로서로 속여서 근본 마음을 알지 못하고
무정물(無情物=불상을 말함)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 하도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지라 이익이 없느니라.
부처는 허물이 없건만 중생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마음 밖(心外)에서 부처를 찾지 말지어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할 수 없나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보지 못하리라.
다만 밖의 부처일 뿐이니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니라.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가지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곧 부처일 것이요,
성품을 보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齋戒)를 지키거나
계를 지킨다면 아무런 이익도 없느니라.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 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스런 과보를 받거니와,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
만일 자기를 분명히 알지 못했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참문(參門)해서 생사의 근본을 깨칠지어다.
만일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
나니
비록 十二부경(部經=경전의 내용에 따른 분류)을 다 외운다
하여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계에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아 벗어 날 기회가 없으리라.
옛날에 선성(善性)이란 이가 십이부경을 다 외웠건만
여전히 윤회를 면치 못했으니,
이는 오직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선성도 그러하였거늘
요즘 사람들은 겨우 서너 권의 경론(經論)을 외우고서 법을
깨달았다 하나니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만일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부질없는
문구나 외워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으려 한다면 모름지기 성품을 보아야 하나니,
성품이 곧 부처(心卽是佛)니라.
부처란 자유로운 사람이며 일없고 작동 없는 사람이다.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한다면 종일토록 분주히 밖을 향해 구하면서
부처를 찾아도 전혀 얻지 못하느니라.
비록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나 아직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선지식께 참문해서 간절히 애써 구하여 마음이 열리게
할지어다.
나고 죽은 일이 크니 헛되이 보내지 말라.
스스로 속여서 이익이 없느니라.
진기한 보물이 산같이 쌓이고 권속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더라도
눈을 뜰 때에는 보이거니와 눈을 감은 뒤에도 보이던가?
그러므로 『유위의 법은 꿈이나 허깨비 같음』을 알 수 있으리라.
만일 서둘러서 스승을 찾지 않으면
헛되이 한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
그렇다면 불성을 본래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기 어려우니
스승을 인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가 드무니라.
만일 자기 스스로가 인연 따라 깨달아서 성인의 뜻을 얻은 이는
선지식을 참문할 필요가 없나니,
이는 태어나면서 아는 수승한 학문이거니와
만일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진댄
모름지기 애써서 참구해 배워야 하리니,
가르침에 의하여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으리라.
만일 스스로가 분명히 깨달았을진댄 배우지 않아도 되나니,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거니와 검고 흰 것을 분별치 못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노라 망언(妄言)을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런 종류는 빗발 같이 설법을 하더라도 모두가 악마의 소리요
부처님의 말씀은 아니니라.
스승은 악마의 왕이요. 제자는 악마의 백성이거늘,
미혹한 사람들은 그의 지휘에 따라 모르는 곁에 생사의 바다에
따르는 도다.
오직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망녕되이 부처라 하나
이런 중생들은 큰 죄인이라
온갖 중생들을 속여서 악마의 경계에 들게 하느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설사 십이부경을 모두 연설하여도
모두가 악마의 말이요 악마의 권속일지언정 부처의 제자는
아니니라.
이렇게 검고 흰 것을 가릴 줄 모르거늘 무엇에 의하여 생사를
면하리요.
만일 성품을 보면 부처요 성품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니라.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부처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부처가 지금어디에 있는가?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니라.
성품밖에 부처가 없는지라 부처가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제하고는 부처를 얻을 수 없고
부처밖에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3. 미혹한 마음으로는 만행을 하여도 윤회를 면치 못함.
미혹한 마음으로는 만행을 하여도 윤회를 면치 못함.
(迷心萬行未免輪廻)
물음이라
「성품을 보지 못했더라도
염불하고 경 읽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하고 정진해서
널리 복을 닦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대답이라.
못하느니라.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못합니까?
대답이라.
조그만 치라도 얻을 법이 있으면
"이는 유위의 법이며, 인과의 법이며,
과보를 받는 법이며, 윤회하는 법"이라
생사를 면치 못하거늘 언제 부처를 이루리요?
부처를 이루려면 성품을 보아야 하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등의 말이 모두가 외도의 법이니라.
만일 부처라면 외도의 법을 익히지 않나니,
부처란 업(業)도 없는 사람이며,
인과(因果)도 없는 지위이니,
조금만치의 법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모두가 부처를 비방하는 짓이니라,
어떻게 부처를 이루리요?
한 마음 한 기능 한 견해
한 소견이라도 집착해 있다면 부처는 모두 허용치 않느니라.
부처는 지키고 범함이 없는지라,
심성(心性)이 본래(本來) 공(空)하고
또 더럽거나 깨끗한 법도 아닌지라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원인도 결과도 없느니라.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선을 닦지도 않으며, 부처는 악을 짓지도 않으며,
부처는 정진을 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게으르지도 않나니,
부처란 작위 없는 사람이라, 집착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부처는 이를 허락지 않느니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말지어다.
만일 이런 이치를 보지 못하면
언제나 어디서나 근본 마음을 알 수는 없느니라.
성품을 보지 못하고서 항상 작위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큰 죄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기공(無記空. 아무 分別이 없는 空)에 떨어져서
캄캄한 것이 마치 취한 사람 같아서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하
리라.
만일 작위 없는 법을 닦으려 하거든
우선 성품을 본 뒤에
반연(妄相=본성품위에 나타난 망상하는 생각)하는 생각을 쉴
지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어떤 사람이 인과(因果)를 무시하고 분주히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망녕되이 말하기를
[본래 공해서 나쁜 짓을 하여도 허물이 없다] 한다면
이런 사람은 무간지옥, 흑암지옥에 빠져서 영원히 벗어날 기약
이 없으리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런 견해를 짓지 않느니라.
물음이라.
만일 분별하고 운동하는 온갖 시간이 모두가 근본 마음일진대
색신(色身)이 죽을 때엔 어찌하여 근본 마음이 보이지 않는
가요?
대답이라.
근본 마음이 항상 눈앞에 나타났으되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로다.
마음이 이미 눈앞에 나타나 있다면 어찌하여 보지 못합니까?
도리어 물음이라.
[그대는 꿈을 꾼 적이 있는가?]
[꾸었습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에 그대의 근본 몸이였던가?]
[예, 근본 몸이였습니다.]
거듭 물음이라.
[그대가 말하고 분별하고 운동하던 것이 그대와 같던가
다르던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르지 않다면 이 몸 그대로가 그대의 근본 법신이며
이 근본 법신 그대로가 그대의 근본 마음이니
라.]
이 마음이 끝없는 옛부터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전혀 나고 죽은 적이 없는지라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옳고 그름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모습도 없으며
중과 속인 늙은이와 젊은이의 모습도 없으며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으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증득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으며, 인도 없고 과도 없으며
힘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느니라.
산이나 강이나 석벽이라도 장애하지 못하며
들고나고 오고 가고 옴에 자재하고 신통하니라.
오온(五蘊)의 산을 벗어나며 생사의 바다를 건너리니
온갖 업이 이 법신을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라.
이 마음은 물질의 모습과는 같지 않나니,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사람들은 모두가 보고자하거니와
이 광명 가운데서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일이 항하의 모래 같으되
물어보면 전혀 대답치 못함이 마치 허수아비 같나
니
모두가 자기의 수용(受用=활동)이거늘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중생은 모두가 미혹한 사람이라
미혹를 인하여 업을 지으므로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나오려 하다가도 도리어 빠지나니
오직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시니
중생이 미혹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물으면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는가.?
자기의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은 틀리지 않건만 스스로가 알지 못할
뿐임을 알겠도다
그러기에 이 마음은 밝히기 어려우나 부처님 한 분만이 능히
아시고 그 밖의 인간 하늘 등의 무리는 아무도 밝히지 못하
는 줄 알지니라.
만일 지혜로써 이 마음을 분명히 알면 비로소
법성(法性)이라 부르며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나니,
생사(生死)가 구애하지 못하며, 온갖 法도 구속하지 못하므로
대자재왕불(大自在王佛)이라 하며, 부사의(不思議)라고도 하며,
성인(聖人)의 본체(本體)라고도 하며,
장생불사(長生不死)라고도 하며,
큰 선인(大仙人)이라고도 하느니라.
성인들의 갖가지 분별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나니
마음의 한량이 광대하여 끝없이 응용(應用)하느니라.
눈에 응하여는 빛을 보고,
귀에 응하여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응하여는 냄새 맡으며,
혀에 응하여는 맛을 알며,
나아가서는 온갖 활동이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며,
[언제든지 언어의 길이 끊이고,
마음으로 따질 곳이 없어졌으니,]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라,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몸매(色)가 다함이 없으며, 지혜도 그러하다] 하시니,
몸매가 다함이 없는 것이 곧 자기의 마음이니라.
마음이 능히 온갖 것을 분별하며
나아가서는 온갖 분별과 운동이 모두가 지혜이니
마음이 형상이 없으므로 지혜도 다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의 몸매가 다함이 없고 지혜도 그러하다]하시니,
四大로 된 몸매는 번뇌의 몸인지라 생멸이 있거니와
法身은 항상 머무르되 머무는 바가 없어서
여래의 법신이 항상 변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기를
[중생이란 응당 불성이 본래 있는 몸임을 알아야 한다] 하시니,
가섭(迦葉)은 다만 본성을 깨달았을 뿐이요 딴 일이 없느니라.
본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성품이니
이는 부처님들의 마음이라
앞 부처와 뒷 부처가 오직 이 마음을 전하셨을 뿐
이 마음밖에 따로 부처를 찾을 수 없느니라.
뒤바뀐 중생이 자기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구하되 종일토록 설치면서 부처를 염하고 부처에게 절을
하나니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소견을 짓지 말지어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마음밖에 딴 부처가 없느니라.
경에 말씀하기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하시고
또 말씀하기를
"경 있는 곳마다 부처가 있다."하셨으니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지라,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만일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거든 절대로 예경
하지 말지어다.
내 마음이 공적 하여 본래 이런 모습이 없나니, 만일 형상을
취하면 곧 마에 포섭되어서 모두가 삿된 道에 떨어지니라.
만일 허깨비가 마음에서 일어난 줄 알면 예경할 필요가 없나니,
절하는 이는 알지 못하고,
아는 이는 절하지 않느니라.
예경하면 곧 마에 포섭되리니,
學人이 행여나 알지 못할까 걱정되어 이렇게 풀이
하노라.
부처님들의 근본 성품 바탕 위에서 도무지 이런 모습이 없나니
꼭 명심할지어다.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든 결단코 채근하지도 말고
또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혹을 내지도 말지어다.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거늘 어디에 이러한 모습이 있으리요.
나아가서는 하늘, 용. 야차. 귀신. 제석. 범왕(梵王)등에게라도
공경할 생각을 내지 말며 두려워하지도 말지어다.
내 마음이 본래 공적한지라 온갖 모습이 모두가 허망한 형상
이니 다만 형상만은 취하지 말지어다.
만일 부처라는 견해나 법이란 견해를 일으키거나
또는 부처나 보살의 모습에 대하여 공경할 생각을 낸다면
스스로가 중생의 축에 들리라.
만일 바르게 알고자 한다면 온갖 형상에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되나니 다시 딴 말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하시니,
도무지 "일정한 형상이 없으며 환(幻)에 일정한 상이 없는 지라",
이것이 무상한 법이니 다만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거룩한
뜻에 부합되리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온갖 형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한다."하시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4. 공경치 않아야 하는 이유(明不敬所以)
공경치 않아야 하는 이유(明不敬所以)
물음이라.
[어찌하여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절을 하지 말라고 하는가요?]
대답이라.
[하늘의 마. 파순(波旬)과 아수라(阿修羅)등이 신통을 나투어
모두가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이루되 갖가지로 변화했기 때문
이니 그는 외도인지라 모두가 부처가 아니니라.]
[부처란 자기의 마음이니 부처에게 잘못 절하지 말라.]
부처란 신령스런 느낌이니 근기에 응하고 중생을 제접하며
눈썹을 끄떡이거나 눈을 깜박이며, 손을 움직이고 발을 옮기는
것이 모두가 자기의 신령스런 느낌의 성품이니라.
성품(性品)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도(道)요,
도(道)가 곧 부처이니, 부처라는 한 글자는 범부(凡夫)가 헤아
릴 바가 아니니라.
또 말하기를
"근본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라 하니 근본 성품을 보지 못하
면 부처가 아니니라.
설사 천경만론(天經萬論)을 강설하더라도 성품을 보지 못하면
다만 법부일 뿐 부처의 법은 아니니라.
지극한 道는 깊고도 멀어서 말로는 이해할 수 없
나니
경전으로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근본 성품을 보기만 하면 한 글자도 모를지라도 좋으니라.
성품을 보면 곧 부처이니
성스러운 본체는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느니라.
모든 말씀이 모두가 성인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작용이니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하여 명칭이나 말로도 미칠 수 없거늘
十二부경이 어찌 미칠 수 있으리요.
道는 본래 뚜렷이 이루어졌나니 닦고 증득함이 필요치 않으
며, 道는 소리나 빛이 아니어서 미묘하여 보기 어려우니,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가 아는 것 같으
니라.
또 남을 향해 말하지 말지어다.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고 그 밖의 인간이나 하늘 등의 무리들
은 도무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느니라.
범부는 지혜가 미치지 못하므로 겉모습에 집착하나니
자기의 마음이 본래 공적한 줄을 알지 못하고 망념되이
겉모양과 온갖 법에 집착하면 곧 외도의 무리에 떨어지리라.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알면 집착이 있을 수 없나니
집착하면 알지 못하느니라.
만일 근본 성품을 보면 十二부경이 모두 부질없는 문자니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오직 마음을 밝혔을 뿐이니 말끝에
계합해 알면 교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지극한 진리는 말을 떠났고"
교법은 말씀일 뿐이니 진실로 道가 아니니라.
道는 본래 말이 없으므로 말은 허망일 뿐이니라.
꿈에 누각이나 궁전이나 상마(象馬)의 무리나 나무 숲. 못.
정자 등의 모습을 보거든 잠깐만이라도 즐기어 집착할 생각
을 내지 말지니 모두가 "망념(妄念)이" 의탁해서 생기는
곳이니라,
부디 주의할 지니라.
임종할 때에 전혀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곧 의혹을 제하거
니와, "털끝만치의 망념이라도 일으키기만 하면 곧 마에 끄달
리느니라.
법신은 본래 청정하여 느낌이 없건만
다만 미혹한 까닭에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 때문에 망념되이 업보를 받는 까닭에
즐기고 집착하여 자유롭지 못하느니라.
지금이라도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곧 습성에 물들지 않으리라.
성인의 경지에서 범부의 경지에 들어가서
갖가지 잡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본래 중생을 위한 까닭이니,
성인의 역. 순.(逆順)에 자제하여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느니라.
성인의 지위를 이룬지 오래되어 큰 위덕이 있나니
온갖 종류가 성인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므로
천당과 지옥도 그 "성인"을 어찌하지 못하리라.
범부는 어두워서 성인이 안팎이 밝은 것 같지 못하나니,
만일 의심이 있거든 일으키지 말라.
일으키면 생사의 바다에 헤매어서 후회하여도 구제할 길이
없으리라.
빈궁과 고통이 모두가 망상에서 생겼나니, 만일 마음을 알아서
서로 서로 경책해서 작용하는 티없이 작용하면 곧 부처의
지견(知見)에 들리라.
처음으로 발심한 사람은 정신이 전혀 안정되지 못하나니
꿈속에 자주 이상한 경계를 보더라도 선뜻 의심하지 말
지니다.
모두가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났는지라 밖에서 온 것이 아니
니라.
꿈에 광명 솟는 것이 햇빛보다 밝은 것을 보면
나머지 습기가 몽땅 다하고 법계의 성품이 나타나리라.
만일 이런 일이 있으면 부처를 이루는 요인이 되리니 이는
자기만이 알뿐이요,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느니라.
혹 고요한 숲 속에서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다가
크고 작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남에게 말하지
말며
또 집착하지 말지니 자기 성품의 광명이기도 하니라.
혹 어두운 밤에 다니고 멈추고 앉고 눕다가
낮같은 광명이 눈에 뜨이더라도 괴이하게 여기지 말지니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 밝아지려는 징조이니라.
혹 꿈에 별과 달이 분명하게 보이면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의
모든 반연이 쉬려는 조짐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꿈에 어두워서 밤중을 다니는 것 같음을 보면
또한 자기 마음의 번뇌의 장벽이 무겁다는 조짐이니
또한 스스로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근본 성품을 보았거든 경을 읽거나 염불을 할 필요가
없나니 많이 배우고 널리 아는 것이 별 이익이 되지 못하
고 도리어 정신이 어두워지느니라
교법을 시설해 놓은 뜻은 마음을 표방하기 위한 것인데
마음을 알면 교법을 볼 필요가 없느니라.
만일 범부로부터 성인의 경지에 들고자 한다면
업을 쉬고 정신을 길러서 분수에 따라 세월을 보낼 지어다.
성냄과 기뻐함이 많으면 도와 더불어 어기나니 스스로를
속일 뿐, 이익이 없느니라.
성인은 생사 가운데서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숨고
나타남이
일정하지 않나니 온갖 업이 그를 구애하지 못하며 도리어
삿된 마군들을 무찌르느니라.
중생들이 근본 성품을 보기만 하면 나머지 습기가 몽땅
다하고 정신이 어둡지 않느니라.
참으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한 법에만 집착하지 말고 업을
쉬어 정신을 기를지어다.
나머지 습기가 다하면 자연히 밝아져서 공부를 할 필요가
없느니라.
외도(外道)는 부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공력은 가장 많이
쓰나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거슬리므로 종일토록 서둘러서
염불하고 경을 읽어도 정신이 어두워 윤회를 면하지 못하
느니라.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라 어찌 구구할 필요가 있으며
명리(名利)를 널리 구한들 후일 무엇에 쓰리요.
단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며 오래도록
정진을 배우며 하루 여섯 차례 예불하며 오래 앉아 눕지
않으며 널리 배워 많이 아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나니
이런 중생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이니라.
전의 부처와 나중의 부처가 오직 성품을 보라는 말씀만 하셨나니
성품을 보지 못하고 망녕되이 말하기를
[내가 위없는 도를 이루었노라] 한다면
이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이니라.
십대제자 가운데서 경희(慶喜=아난)가 많이 알고
널리 배워서 식견(識見)이 으뜸 이였으나
[성문과 외도들로 하여금 오직 무식하게 되라]고 한다고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으니,
글자 수효나 아는 것으로 닦아 증득 한다하면 인과의 법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의 업보이어서 생사를 면치 못하며
부처님의 뜻에 어기는 것이니
곧 부처를 비방하는 중생인지라 죽여도 죄가 없느니라.
경에 말씀하시기를
[천제(闡堤 :선을 끊고 악을 행하는 사람)는
믿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죽여도 죄가 없다] 하셨느니라.
만일 진정한 믿음이 있을진댄
이 사람은 바로 부처 지위의 사람의 사람이라 성품을 보지 못했
거든 절대로 다른 어진 이를 비방하지 말지어다.
스스로 속여서 이로울 것이 없느니라.
선과 악이 뚜렷하고 인과가 분명한지라,
천당과 지옥이 오직 눈앞에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믿지 않는 까닭에 흑암지옥(黑暗地獄)에 떨어지
는 것을 보고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나니
오직 업장이 무거우므로 믿지 않느니라.
마치 소경이 햇빛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 같으니
설사 그에게 말해 주더라도 역시 믿지 않은 것 같으니라.
오직 눈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햇빛을 분별할 수 있으리요?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방금 축생 등 잡된 무리에 떨어
졌거나 빈궁 하천한 무리에 태어나서 살려해도 살 수 없고
죽으려해도 죽을 수 없느니라
비록 이런 고통을 받으나 직접 물어보면 도리어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괘락한 것이 천당과 다르지 않다] 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태어난 곳으로써 쾌락을 삼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임을 알겠도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오직 업장이 두텁기 때문이니라.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면
머리와 수염을 깎는데 관계치 않나니
속인도 부처가 될 수 있느니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머리와 수염을 깎았더라도 역시 외도
이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5. 도는 중과 속인을 분별치 않는다.
도는 중과 속인을 분별치 않는다.(道不在山野)
물음이라 .
[속인(白衣)은 처자가 있어 음욕을 제하지 못했거늘
어떻게 부처를 이루리요?]
대답이라.
[견성(見性=성품을 보는 것)만을 말했을 뿐
음욕은 말하지 않았으니 성품을 보기만 하면
음욕이 본래 공적해서 끊어 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 집착하지도 않으리니
설사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해치지 못하리라.]
무슨 까닭인가?
성품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니
비록 오온(五蘊)의 색신 속에 묻혔더라도
그 성품은 본래 청정해서 물들이지 못하느니라.
법신(法身)은 본래 느낌(受:감수성)이 없으며,
주림과 목마름도 없으며, 추위도 더위도 없으며,
질병도 없으며, 은혜와 사랑도 없으며,
권속도 없으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으며,
좋고 나쁨도 없으며, 길고 짧음도 없으며,
강함과 약함도 없어서, 본래 한 물건도 얻을 수 없건만,
다만 이 색신이 있기 때문에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괴질
과 질병 등의 모습이 있게 되었나니, 만일 속이지 않게 되였
거든 마음대로 행동해 보라.
만일 생사 가운데서 자유로움을 얻어서
온갖 법을 굴리어 성인들의 신통과 같이 자유로와 걸림이 없
으면 편안치 않은 곳이 없으리라.
만일 마음에 의심이 있으면 결정코 온갖 경계를 통과하지 못
하여 생사의 윤회를 면하지 못하겠거니와,
만일 성품을 보면 전다라(전陀羅=천민)라도
부처를 이루리라.
- 선문촬요 -
백정도 도를 이룰 수 있다(屠漢亦得成道)
물음이라
[전다라는 살생으로 업을 삼거늘 어떻게 부처를 이루리요?]
대답이라.
[성품을 보라고만 말했을 뿐,
업 짓는 것은 말하지 않았나니
설사 업을 짓더라도 미혹한 사람과는 달라서
온갖 업이 그를 구속하지 못 하나니라.]
끝없는 옛날부터 오직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는지라
그 까닭에 업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거니와
근본 성품을 깨달으면 끝내 업을 짓지 않으리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염불을 하더라도 과보를 면할 수
없나니 살생이 문제가 아니니라.
성품을 보아 의혹을 활짝 제하면
생명을 살해하더라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서천(西天)의 二十八祖들도 오직 마음을 전하셨고,
내가 이제 이 땅에 온 것도
오직 돈교(頓敎:당장 성불하는 법을 보인 교법)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법을 보였을 뿐이요.
계행 지키기와 정진과 고행과 나아가서는
불이나 물에 드는 법과 칼산에 오르는 것과
한 끼니 먹고 오래 앉아 눕지 않는 법을 말하지 않나니
모두가 외도 유위의 법이니라.
만일에 분별하고 운동하는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알면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님들의 마음이니라.
전의 부처님과 뒤의 부처님이 오직 마음을 전하는 법을 말씀
하셨고 다시 딴 법이 없으시니
만일 이 마음을 알면 한 글자도 몰라도 부처를 이루느니라.
만일 자기의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알지 못하면
설사 몸이 부서져 먼지 같이되더라도 성불은 끝내 어려우니라.
부처란 법신(法身)이라고도 하며, 마음 깨달은 이라고도
하나니, 이 마음은 형상도 없고 인과도 없으며,
힘줄도 뼈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잡을 수 없나니,
물질의 세계와 같지 않으며 외도와 같지도 않느니라.
이 마음은 여래 한 사람만이 아시고 그 밖의 중생, 미혹한 사람
은 똑똑히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마음은 四대의 색신을 여의지 않았나니
만일 이 마음을 여의면 운동할 이도 없느니라.
이 몸은 알음(知)이 없어 초목이나 기왓쪽 같은지라
몸은 감정이 없거늘 어떻게 운동하리요.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분별하고 운동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모두가 마음의 움직임이며 작용(用)의 움직임이니라.
움직임이란 마음의 움직임이요
움직임 그대로가 작용이니
움직임과 작용이외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밖(心外)에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움직인다면 마음이 아니요
마음이라면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임이란 본래 마음이 없고
마음이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움직임은 마음을 여의지 않았고
마음은 움직임을 여의지 않았으나
마음에는 여윈다는 것도 여의 였다는 것도 없으며
마음에는 움직인다는 것도 움직였다는 것도 없느니라.
이는 마음의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니,
마음 그대로가 작용과 작용한 것이며,
마음 그대로의 움직임과 움직인 것이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움직임도 아니요 작용함도 아니니
작용의 바탕이 본래 공한지라
공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니라.
움직임과 작용이 다 같이 마음이나
마음의 근본은 움직임이 없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움직이되 움직인바가 없다" 하시니,
종일토록 가고 오되 가고 온 적이 없고,
종일토록 보되 본 적이 없고,
종일토록 웃되 웃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듣되 들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알되 안 적이 없고,
종일토록 기뻐하되 기뻐한 적이 없고,
종일토록 다니되 다닌 적이 없고,
종일토록 멈추었으되 멈춘 적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말로써 표현할 길이 끊였고 마음으로 따질 자리가 없어졌다"
하시니 보고 듣고 아는 것이 본래가 원적(圓寂)한지라,
성나고 기쁘고 가렵고 아픔이 어찌 본래의 사람과 다르리요?
더욱더욱 미루어 찾건대 아픔과 가려움을 찾을 수 없도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쁜 업은 곧 괴로운 과보를 받고, 착한 업은 곧 좋은 과보를
받는다] 하시니 성내면 지옥에 빠지고
기뻐하면 하늘에 태어날 뿐 아니라,
성냄과 기뻐함의 성품이 공한 줄 알아서
집착하지만 않으면 업력(業力)을 벗어나리라.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경론을 강설하더라도
결코 아무런 힘이 되지못하리라.
설명하자면 끝이 없기에 간략히 삿됨과 바름을
이렇게 간략히 표방하였거니와 모두가 미치지 못하노라.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음, 마음, 마음이라지만
찾을 길 없어라
퍼지면 법계에 두루하고
움츠리면 바늘 끝도 용납치 못한다.
나는 본래 마음을 찾을 뿐
부처를 구한 적 없나니
三界의 모든 것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아노라.
부처를 구하려거든
마음만을 구할지니
이 마음이란 마음 그대로가
마음 그대로의 부처로다.
내 본래 마음을 구하지만
마음은 스스로 가지고 있나니
마음을 구하려면
마음을 알기를 바라지 마라.
부처의 성품이란
마음 밖에서 얻는 것 아니니
마음이 생길 때가
곧 죄가 생기는 때니라.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중생을 건지려 함이니
한 송이 꽃에 다섯 잎이 피어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리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7. 마음을 관하다.(觀心)
Ⅱ, 달마 관심론(達磨 觀心論)
마음을 관하다.(觀心)
달마께서 혜가의 물음에 대답하셨다.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행을 포섭하나니
간단하고도 요긴함(省要)이라 하느니라.]
또 대답하셨다.
[마음은 만가지 법의 근본이라
모든 법이 마음에서 생기나니
마음을 알면 만가지 수행(萬行)이 구비하리라.]
비유하건대 큰 나무의 가지와
꽃과 열매 등이 모두가 뿌리로 인하여 있나니,
나무를 가꾸려는 이는 뿌리를 두어야 비로소 살 것이요,
나무를 치려는 이는 뿌리를 없애면
반드시 죽는 것과 같이,
마음을 알아서 道를 닦으면
공은 적게 들여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를 닦으면
헛수고만 하고 이익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알라.
온갖 선과 악은 모두가 스스로의 마음에서 생겼나니
마음 밖에서 달리 구하면 마침내 옳지 못하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8. 마음은 염법과 정법의 요인을 갖추었다.
마음은 염법과 정법의 요인을 갖추었다.(心具染淨緣起)
또 대답하셨다.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본래 공하여 〈나〉가 없음을 알며,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작용이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나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요,
둘째는 더러운 마음이다.
청정한 마음이라 함은
무루(無漏)인 진여(眞如)의 마음이요,
더러운 마음이라 함은
유루(有漏)인 무명(無明)의 마음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본래부터 함께 존재하는 것"이어서
비록 "인연에 의해 어울릴지언정"
"서로 생기게 하지는 못하느니라"
청정한 마음은 항상 선인(善因)을 즐기고,
더러운 마음은 항상 악업(惡業)을 생각하나니,
만일 진여(眞如)를 깨달아 깨달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성인이라 하여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락을 증득할 것이요,
더러움을 따라 악업을 지어 얽힘과 덮임을 당하면
범부라 하여,
삼계(三界)에 빠져서 갖가지 고통을 받으리라.
무슨 까닭인가?
더러운 마음이 진여의 본체를 가렸기 때문이니라.
어려운 말 풀이
1. 사대(四大) = 흙(地) 물(水) 화(火) 바람(風)등의 네 가지
요소이니 안으로는 몸을 이루고 밖의로는
국토를 이룬다.
2. 오온(五蘊) =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이니 물질(色)인 몸과 느낌(受) 생각(想) 지
어감(行) 의식(識)등인 마음이다.
3. 무루(無漏) = 누락(漏落)될 요인이 없다는 뜻이니
윤회에 끄달리는 대열에 들지 않는다는 말.
4. 진여(眞如) = 진리란 뜻이니 허망치 않으므로 眞이요.
변하지 않으므로 如라고 한다.
5. 유루(有漏) = 누락(漏落)될 요인이 있다는 뜻이니 윤회에
끄달리는 요인
6. 무명(無名) = 근본 어리석음.
7. 본래부터 함께 존재하는 것(本來俱有) = 금과 금물과의 관
계 같은 것.
8. 인연에 의해 어울림(假緣合) = 인연이 없다면 眞妄이 모두
실체가 없다.
9. 서로 생기게 하지는 못함(互不相生) = 眞은 妄을 생기게
하지 못하고 망은 진을 생기게 하지 못함.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09. 진심이 망을 인하여 나타나지 않음
진심이 망을 인하여 나타나지 않음.(眞心因妄不現)
십지경(十地經)에 말씀하시되
[중생의 몸 안에 금강(金剛) 같은 불성이 있음이
마치 해가 밝고 원만하고 광대하고 끝이 없는 것 같건만
다만 오음(五陰)의 검은 구름에 가려진 것이
마치 병(甁)안의 등불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 같다]하시고
또 열반경(涅槃經)에 말씀하시되
[모든 중생이 모두가 佛性이 있으되
無名의 가리어졌기 때문에 해탈치 못한다] 하셨다.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0. 착한 법은 깨달음으로 뿌리를 삼는다.
착한 법은 깨달음으로 뿌리를 삼는다.(善法以覺爲根者)
佛性이라 함은 ??
깨달음을 이름이니 다만 능히 스스로가 깨달아서
깨달은 지혜가 밝아져서 덮히였던 것을 여의기만 하면
해탈(解脫)이라 한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은 깨달음이 근본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의 뿌리에 의하여 모든 공덕의 나무가 나타나거든,
열반의 열매가 이로 인하여 이루어지나니
이렇게 마음을 관하는 것을 알았다 하느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1. 나쁜 법은 삼독(三毒)의 뿌리이다.
나쁜 법은 감독(三毒)의 뿌리이다.(惡法以三毒爲根)
혜가가 물었다.
[무명의 마음과 모든 악은 무엇이 뿌리가 되나이까?]
달마께서 대답하셨다.
[무명의 마음이 비록 八만四천 번뇌와 정욕(情欲)이 있어서
항하(恒河)의 모래 같이 많은 온갖 악이 수효도 끝도 없으나
간추려서 말하건대
모두가 삼독으로 인하여 근본을 이루느니라.
삼독(三毒)이라 함은
"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痴心)"이다.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이 본래부터 온갖 악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큰 나무가 뿌리는 하나지만
거기에서 생긴 가지와 잎은 무수한 것 같거니와,
이 삼독의 뿌리가 낱낱 뿌리에서 온갖 악업을 내는 것은
앞의 비유보다 백. 천. 만 곱이나 더하여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2. 여섯 가지 도적의 정체를 밝힌다.
여섯 가지 도적의 정체를 밝힌다.(正明六賊)
이러한 삼독은 ??
하나인 본체(本體)에서 스스로 삼독(三毒)이 되었거니와
만일 六根에 맞추어 나타나면 육적(六賊)이라고도 하나니
六賊이라 함은 곧 六識이라.
이 六識이 여러 감관(根)으로 드나들면
온갖 경계에 물들어 자연히 惡業을 이루어
眞如의 바탕을 장애하였는 까닭에 육적이라 하느니라.
모든 중생이 이 삼독과 육적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힘으로 인하여 생사에 빠져들며,
육취(六趣)에 헤매면서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이,
마치 큰 강이 작은 샘이 쉬지 않고 흐름으로 인하여
마침내 철철 넘쳐흘러 만리의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으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3. 삼독의 뿌리를 끊으라.
삼독의 뿌리를 끊으라.(斷三毒根)
若復有人 - 어떤 사람이
斷其根源 - 그 뿌리와 근원을 끊으면
則衆流 - 모든 흐름이
皆息 - 다 쉬느니라.
해탈(解脫)을 구하는 이가 삼독을 돌려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만들고
육적을 돌려
육바라밀로 만들면
자연히 모든 고통을 여의게 되리라.
어려운 말 풀이
1) 삼취정계(聚淨戒) =
계율의 근본 취지를 세 가지로 묶은 것이니
첫째 착한 법을 두루 행하라.
둘째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라.
셋째 계법을 잘 지키라 이다.
2) 육바라밀(波羅蜜) =
보살의 수행 덕목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니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이다.
바라밀은 도피안이라 번역하니
저쪽 언덕에 이른다는 뜻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4.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을 밝힘(明三聚六波羅密)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을 밝힘(明三聚六波羅密)
물었다.
삼취정계를 지키고
육바라밀을 행하여야 불도를 이루거늘
어찌 배우는 이로 하여금
오직 마음만을 관함을 지켜라 하니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부처를 이루리요?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삼취정계는
곧 삼독의 마음을 끊는 것이니
하나의 독을 끊으면
무량한 선의 모습(善聚)을 성취하느니라.
취(聚)라 함은 모았다는 뜻이니
삼독의 마음을 능히 끊으면
세 가지 많은 선이
모두 마음에 모이기 때문에
삼취정계라 한다.
六바라밀은
육근(六根)이 청정한 것이니
인도에서는 바라밀이라 말하고
한나라에서는
"저 언덕에 건너갔다(達彼岸)"이다.
즉 육근이 청정하여 세상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번뇌를 벗어나서 저 언덕에 이른 것이니
그러므로 육바라밀이라 이름한다.
또 물었다.
삼취정계라 함은
모든 악을 끊기를 서원하며,
온갖 선을 닦기를 서원하며
모든 중생들을 제도 할 것을 서원 하는 것인데
삼독을 끊기만 하라. 하시니
이는 경문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달마 대사가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정이 진실해서 마땅히 거짓됨이 없나니라.
보살이 지난 세상 인행(因行)의 지위에서
보살행을 닦을 때에 삼독을 물리치기 위하여
세 가지 서원을 세워 삼취정계를 지키셨으니,
항상 계를 닦는 것은 탐욕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맹세코 모든 악을 끊기를 서원하지 때문이요,
항상 선정을 닦는 것은 화냄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모든 선을 닦기 서원하기 때문이요
항상 지혜를 닦는 것은 어리석음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니
모든 중생을 건지기 서원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계(戒) 정(定) 혜(慧)
세 가지 청정한 법을 지킴으로
삼독의 악업을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나니,
삼독을 끊으면 모든 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끊는다는 것이요,
삼취정계를 가지면
모든 착한 것이 갖추어지므로 닦는다고 말하며,
악을 끊고 선을 닦으면
모든 수행의 행동이 이루어져서 나와 남이 모두 이롭게 되어
중생을 두루 제도하기 때문에 건진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계를 닦는 일도 마음을 떠난 것이 아닌
줄 알지니라.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5. 미혹하면 육취가 나타남(迷現六趣)
미혹하면 육취가 나타남(迷現六趣)
또 대답하셨다.
[어떤 중생이 정인(正因)을 알지 못하고
미혹한 마음으로 선(善)을 닦으면
삼계를 면치 못해서
세 가지 가벼운 갈래(三輕趣)에 태어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 하는가?
미혹한 마음으로
"十善"을 닦아서
망녕되이 쾌락을 구하면
탐욕의 경지를 면치 못해서,
하늘 갈래(天趣)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오계(戒)"를 지켜 망령되이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면
성냄의 경지를 면치 못해서
인간 갈래(人趣)에 태어나고,
미혹한 마음으로
"위(有爲)"에 집착하여
삿된 법을 믿고 복을 구하면
어리석음의 경지를 면치 못하여
아수라의 갈래(修羅趣)에 태어나느니라.
이러한 세 종류를 통털어
세 가지 가벼운 갈래라 하느니라.
무엇이 세 가지 무거운 갈래인가?
삼독의 마음을 마음대로 부려서 나쁜 업만을 짓는 것이니
탐욕이 무거운 이는
아귀의 갈래(餓鬼趣)에 떨어지고,
성냄이 무거운 이는
지옥의 갈래(地獄趣)에 떨어지고,
어리석음의 업이 무거운 이는
축생의 갈래(畜生趣)에 떨어지나니
이러한 세 가지 무거운 갈래와
앞의 세 가지 가벼운 갈래를 합하면
여섯 갈래,
즉 육취가 되느니라.
어려운 말 풀이
1). 정인(正因) = 本覺을 깨닫는 방법으로서 가장 빠른 길
2). 십선(十善) = 열 가지 착한 행이니
몸의 셋, 입의 셋. 뜻의 셋이 있다.
3). 오계(五戒) = 불교의 기본 계율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4). 유위(有爲) = 형체가 있고 변할 수 있는 현상계.
- 선문촬요 -
선문촬요 / 16. 육도의 이치를 밝힘(重明六度)
육도의 이치를 밝힘(重明六度)
또 물었다.
"육도라 함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이거늘
이제 말씀하시기를
육근이 청정한 것을
육바라밀이라 하시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육도(六度)를 닦고자 하면
육근을 밝혀야 되고
육근을 깨끗이 하고자 하면
먼저 육적(六賊)을 항복시켜야 한다.
눈의 도적(眼賊)을 버리면
모든 대상을 떠나 마음에 인색함이 없어지므로,
보시라하고,
귀의 경계(耳賊)를 막으면
소리의 대상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지계라 하고,
코의 경계(鼻賊)를 항복시키면
향기와 악취에 균등하여 자유롭게 되므로 인욕(忍辱)이라 하고,
혀의 경계(舌賊)를 다스리면
삿된 맛을 탐내지 않으며 읊고 강설하되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정진이라 하고,
몸의 경계(身賊)를 이기면
모든 애욕에서 초연히 요동치 않으므로 선정이라 하고,
뜻의 경계(意賊)를 조복하면
무명을 따르지 않고 항상 깨달음의 지혜를 닦아
모든 공덕을 즐기어 닦으므로 지혜라 하느니라.
또 도(度)라고 함은
운반한다(運)는 뜻이니
육바라밀은 배와 같은 것이여서
중생들을 운반하여
저 언덕에 이르는 까닭에 육도라 하느니라.
- 선문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