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요지의 중요한 부분
내가 누구인가를 철저히 알려고 하면 나는 절대 누구인가를 알 수없다.
철저히 나를 모르는 상태가 참 나인 것이다.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 성품을 투철히 보는 것’[明悟自心 徹見本性]이다
달마(達摩) 스님이 서쪽(인도)에서 오셔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不立文字 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見性成佛]’ 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하심으로써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임을 아주 분명하게 일러 주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으로 “(마음을) 쉬면 곧 깨닫는다”[歇卽菩提]고 하신 이 쉴헐 ‘쉼’[歇] 만한 것이 없다.
육조의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屛息諸緣 一念不生]
“온갖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萬緣放下 一念不生]라고도 하신 말씀 만한 것이 없다.
(理, 이치)로써 사(事, 현상)를 제(除)함으로써, 비로소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번뇌와 보리(菩提, 깨달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모두 거짓 이름[假名]일 뿐이며, 원래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제각기 눈 앞에 이루어져 있어[各各現成],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魔)의 이야기다’ 한다.
중국에 전해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법문은 종(宗, 선종), 교(敎, 교종), 율(律, 율종), 정(淨, 정토종), 밀(密, 밀교)인데, 이 다섯 가지 법문은 각인의 근기와 성향에 따르기 위한 것이니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一念]으로써 만 생각[萬念]을 물리치는 것이니 이는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다.
‘누구인가[誰]?’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마음이다. 말[話]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話之頭]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之頭]이다. 만법(萬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萬法之頭]인 것이다. 실로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念頭, 생각 이전의 자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이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一念未生之前]이 바로 화두인 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看, 참구한다]는 것은 곧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反聞聞自性]고 하는 것은 관(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反觀觀自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淸淨覺相]을 원만히 비추어 본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바로 마음이며 ‘비추어 본다’[照] 함이 곧 관(觀)이다.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이며, 부처를 염하는 것[念佛]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看話頭]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自心淸淨覺體]를 관조(觀照)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성품의 부처[自性佛]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이것은 형상이나 고정된 처소[方所]가 없으므로 끝내 붙잡을 수 없다.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이며, 법계(法界)에 두루하여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本來現成]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인 것이다.
옛날 고봉(高峯) 조사께서 이르기를,
“공부인은 이 화두를 살피기를, 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 이렇게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자르라” 하셨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 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 공부를 잘못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이다.
초심자의 어려움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 순수하게 성숙됨)하지 않아 들어갈 길[門路]을 찾지만 분명하지가 않고, 공부를 해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으면 그저 눈만 껌벅거리며 세월을 보내게 되니, 결국 ‘첫해에는 처음이라 참구해 보는 것이고, 그 다음 해에는 벌써 오래 참구한 것처럼 되며, 3년이 되면 아예 공부를 놓는’ 결과가 되고 만다.
초심자의 쉬움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신심(信心)과, 장영심(長永心)과 무심(無心)만 갖추면 된다는 것이다. 소위 신심이란 것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 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了達, 완전히 통달함)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道)임을 믿는 것이다.
이른바 장영심(長永心)이란, 어떤 한 법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來生)과 후내생(後來生)에 이르도록 오로지 이와 같이 지켜가는 것이다. 참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와 같이 참구해야 하고, 염불도 반드시 이와 같이 염해야 하며, 지주(持呪, 주문의 지송)라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지송(持誦)해야 하고, 교학(敎學)이라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고 수행[聞思修]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법문을 수행하더라도 계(戒)가 근본이 된다. 과연 이와 같이 수행해 나가기만 한다면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화두란 바로 한마음[一心]이다. 우리의 이 한 생각 마음[一念心]은 안팎이나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또한 중간이나 안팎에도 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두루하다. 그러므로 화두는 위로 끌어올리지도 말고 밑으로 끌어내리지도 말라. 위로 끌어올리면[提上] 도거(掉擧)가 일어나고, 아래로 끌어내리면[厭下] 혼침(昏沈)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心性)을 어기므로 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진실로 말하면, 진여(眞如)와 망상이 일체(一體)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가 모두 본래 마음[本心]이요 본래성품[本性]이니, 분별할 필요가 없으며,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취하거나 버릴 필요도 없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다. 어디에 허다한 방편[羅索]이 있겠는가. 참구하라(參)!
“전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생의 일을 알고 싶은가. 금생에 짓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사 백 천 겁이 지난다 해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으며 인(因)과 연(緣)이 서로 만날 때 과보를 역시 받게 된다” 하였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원인이 참되지 못하면 결과도 비뚤어진다”[因地不眞 果招紆曲] 하였다. 그러므로 좋은 원인을 심으면 좋은 결과를 맺고 악한 원인을 심으면 악한 결과를 맺는 것이다. 외[瓜]를 심으면 외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 것은 필연적인 도리인 것이다.
인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두 가지 고사(故事)를 들어 이를 증명하겠다.
부처님께서는, “결정된 업은 돌이킬 수 없다”[定業難轉]고 말씀하셨다.
수행하여 도를 이루는 데는 첫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계율은 무상보리(無上菩提, 위없는 깨달음)의 근본이다. 계로 인하여 비로소 정(定, 선정)이 생기고, 정으로 인하여 비로소 반야(般若, 지혜)가 생긴다. 계를 지키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계를 지키는 사람은 하늘(천인)과 용[天龍]이 옹호하고, 사마와 외도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지만, 계를 깨뜨린 사람은 귀신들이 큰 도적이라고 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쓸어버린다.
“육조(六祖) 스님 말씀에, ‘마음이 평안하면 어찌 애써 계를 지킬 것이 있으며, 행동이 곧으면 어찌 굳이 참선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心平何勞持戒 行直何用參禪] 하였다” 한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信爲道元功德母]. 말할 것도 없이, 무슨 일을 하든 신심이 없으면 잘 할 수가 없는 법이다. 우리는 생사에서 해탈하려면 이러한 견고한 믿음을 더욱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대지의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서 능히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셨고, 또 “온갖 법문(法門)은 중생의 마음의 병을 대치(對治, 증상에 대응하여 치료함)하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우리는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이 헛되지 않다고 믿고,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으며, 법답게 노력하지 않으면 역시 성불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되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깊이 믿어야 하며, 또한 법답게 수행하면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영가(永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상을 깨달으면 사람도 법도 없고,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소멸한다[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만약 내가 헛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나오지 못할 것이다[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하셨다. 이는 스님께서 자비심으로 후세 사람들의 신심을 다져주기 위해서였으며, 그래서 이러한 큰 맹세를 하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능엄회상(능엄경을 설하시던 법회)에서 문수보살에게 원통(圓通) 법문을 말씀하실 때,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으뜸으로 치셨다. 마정수기(摩頂授記, 정수리를 만져 주며 언제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해 줌)를 주신다 할지라도 상관하지 말아야 하며, 기뻐해서도 안 된다.
객진번뇌-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교진나(憍陳那) 존자가 객(客), 진(塵) 두 자를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들 초심자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곳이다.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一心不生 萬法無咎]는 것이다.
언제나 뚜렷이 밝아서[單單的的] 한 생각 빛을 돌이켜 다시 반조(返照)한다.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不生不滅] (을 비추어 보는 것)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고도 한다.
염불시수(念佛是誰,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네 글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誰, 누구인가)자이며, 나머지 세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누구인가, 똥 누고 오줌 누는 것은 누구인가라든가, 무명(無明)을 타파하는 것은 누구인가, 혹은 능히 알고 느끼는 이것은 누구인가 해도 마찬가지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막론하고 이 ‘누구인가[誰]’ 하나를 들면 곧 쉽게 의념이 일어날 것이다. 말을 뒤집어서 사량복탁(思量卜度, 이리저리 생각하고 헤아림)할 것이 없으니, 이 ‘누구인가?’ 화두[誰字話頭]야말로 실로 참선의 묘법이라 할 것이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시수’ 네 글자를 가지고 의심하되, 부처님 명호(名號) 부르듯이 한다든지(의심 없이 입으로만 염불하는 것을 말함), 이리저리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고 오직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고 찾는 것을 일러서 의정이라 하는 것이다.
한 덩어리 의념이 현전(現前, 앞에 떠 있음)하여 간단(間斷, 사이가 끊어짐)없이 이어지는데, 이때 비로소 의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야 어찌 공부한다고 말하겠는가? 그저 망상을 제거한다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이르면 참의심[眞疑]이 현전하니 비로소 참으로 공부하는 시절이라 할 것이다. 이 시절에 하나의 큰 관문이 있으니. 흔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된다.
1)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여 한없이 가벼워서[輕安], 만약 조금이라도 각조(覺照, 또렷이 비추어 봄)를 놓쳐버리면 곧 가벼운 혼침(昏沈)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 눈 밝은 이[明眼人]가 옆에 있다면 한 눈에 발견할 것이다. 바로 이 경계를 일러서 ‘향나무 판자로 내려치니 즉시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一香板打下 馬上滿天雲霧散]는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또 이 때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며 텅 비어 있어서 만약 의정이 없으면 곧 무기(無記, 아무 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에 떨어져 마치 죽은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같이 앉아 있게 된다. 혹자는 이를 일러서 ‘찬물이 돌에 부딪쳐 물거품이 인다’[冷水泡石頭]고 하였다. 이 때에는 다시 바로 화두를 들어야 하며, 들면 곧 깨어있어 비추어 보게 된다(깨어있다[覺] 함은 미(迷)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곧 혜(慧)요, 비추어 본다[照] 함은 어지러움[亂]이 없는 것이니 곧 정(定)이다.)
또렷하고 명료한[單單寂寂] 이 한 생각은 맑고 고요하게 비추며[湛然寂照], 여여하게 움직이지 않고[如如不動] 아주 신령스러워 어둡지 않으며[靈靈不眛] 항상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지각하니 찬물에 연기 피어오르듯, 한 줄기로 면면히 이어져 끊이지 아니한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의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이는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는 격이다.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바칠 일이며, 시인이 아니면 시를 바치지 말라’[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不獻詩]는 것이다.
조고화두(照顧話頭)와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참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심(生死心, 생사가 목전에 걸려있다는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간절해야 하며, 동시에 장원심(長遠心, 오래도록 꾸준히 밀고 나가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다.
1) 초심자의 어려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보편적인 병통은 망상(妄想)과 습기(習氣)가 놓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명(無明)과 아만[貢高](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 질투, 장애, 탐냄[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애착[愛], 나태 등의 마음을 일으키고, 먹기를 좋아하며, 옳고 그름과 남과 나[是非人我]를 분별하고 뱃살만 불린다면 어떻게 도(道)와 상응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부잣집 출신은 습기(習氣)를 못 버려서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공부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그들은 본사(本師)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신분의 사람으로서 출가하셨는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공에 떨어질까[落空] 두려워하나, 이미 그들이 귀신굴[鬼]에 태어난 것을 어찌 알겠는가.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으며[空也空不掉], 깨달으려 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悟又悟不來].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써 깨달음을 구하지만, 깨달음을 구하거나 성불을 생각하는 것이 모조리 큰 망상임을 어찌 알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한 두 가지[一兩枝]의 그윽한 (꽃)향기만 맡고도 곧 환희심을 일으키지만, 이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에 머리를 내민 격[盲龜鑽木孔]으로 우연히 얻은 것이지 참으로 공부가 익었기 때문이 아니며 환희마(歡喜魔)가 마음에 든 것임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고요한 가운데[靜中]서는 매우 맑고 깨끗하여 공부가 잘 된다고 느끼지만, 움직임 가운데[動中]서는 되지 않으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고요한 곳을 찾는데, 이들은 이미 동정(動靜)의 두 가지 마왕(魔王)의 권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2) 초심자의 쉬움
공부가 비록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쉬움인가. 무슨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리는 것[放下]이 그것이다.
만약 이 몸뚱이가 한 구의 시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1) 구참자의 어려움
오래 공부한 사람의 어려움이란 어떤 것인가? 오래 공부했다는 것은 참의심[眞疑]을 현전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시절이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서 정(定, 禪定) 중에 얼마간의 지혜를 일으켜 옛 사람의 몇 가지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는 곧 의정을 놓아 버린다. 스스로 크게 깨쳤다고 생각하고는 시를 읊조리고 할(喝, 문답 간에 고함을 지르는 것)을 하며, 눈을 껌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하면, 선지식(善知識)을 자칭하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마구니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달마 스님의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障壁 可以入道]고 하신 말씀과, 육조(六祖) 스님의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때 어떤 것이 명(明)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잘못 알고서, 마른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이 앉아만 있는 것[坐在枯木岩]을 제일로 친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곳으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질러 버린 것도 바로 이런 이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
제3부 참선경어(參禪警語)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란 곧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의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고 한 법도 받는 바 없으며, 닦아서 증득(證得)할 것도 없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마음 속으로) 염하고만 있으니, 이러한 화두는 염화두(念話頭, 실다운 의심이 없이 생각으로 이어가는 화두)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의정이 일어나서 깨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두가 아니라) 화미(話尾) 위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며 생멸법(生滅法,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 일념무생(一念無生)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잠시 해 보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만약 구경(究竟)의 실다운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어찌 기약하겠는가? 요즈음 선종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 이유도 이처럼 화미에 마음을 쓰는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요컨대 일체를 놓아 버려서[放下一切] 범정(凡情, 범부의 마음, 중생심)과 망념(妄念)이 자기의 묘하게 밝은 참마음[眞心]을 더럽히지 않게 해야 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다만 범부의 마음만 없애라. 따로 성인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但盡凡情 別無聖解]라고 하였다.
제5부 수행과 불수행(不修行)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모두 부질없는 말이다. 그대와 내가 자신의 이 마음빛[心光]을 사무치기만 하면 그대로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한다고 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신 경우를 보라. 출가하여 도를 묻고 6년 고행을 거쳐 도를 깨닫고 나서 밤에 샛별을 보면서 탄식하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온 세상의 중생들이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만약 망상만 여읜다면 곧 청정한 지혜[淸淨智], 자연스러운 지혜[自然智], 스승 없이도 스스로 아는 지혜[無師智]가 저절로 현전할 것을......’ 하셨다. 그 후로 49년간 설법하시고 나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하셨다.
모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衆生三無差別]’거나,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견성성불하게 한다’고 인정하셨으며,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설명해 주기도 하고 방망이[棒]를 휘두르거나 고함[喝]을 지르기도 하셨으니, 이는 모두 공부하는 이들의 망상과 분별을 끊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그 분들은 모두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도록’ 한 것이며 조금도 방편적인 복잡한 수단[方便葛藤]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차고 더움[冷暖]은 오직 자기만이 아는 것이다. 삼계(三界) 육도(六道)의 인간과 천인, 귀신들이 비단 그를 엿보고 깨뜨리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부처와 보살들도 또한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이렇거늘 수행한다거나 수행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할 것이 있겠는가? ‘끊듯이[切], 갈듯이[磋], 쪼듯이[琢], 다듬듯이[磨] 하고’, ‘강물로써 씻고 가을 볕으로 쪼여’, 점점 정밀하고 순수하며[精純] 맑고 깨끗한[皎潔] 경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일 없다면[直下無事]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本無一物], 어찌 입을 벌릴 수 있겠는가?
,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나’라고 보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을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오직 놓아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