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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불교강의>

통융 2016. 9. 14. 17:49


“불교는 나의 구원의 길” 고백
<알레프> 등 불교적 소설 집필
이분법 아닌 ‘不二’ 서구에 전해

서구 문명 속 편견 조롱한 문학가
“이성의 왜곡·이분법적 사고 극복”
푸코 등 당대 사상가에 영향 끼쳐

 

 

몇 권의 획기적인 소설작품으로 현대 서구사상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불교를 깊이 공부하고 <보르헤스의 불교강의(1998, 여시아문)>라는 책을 썼으며,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서 자신의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보르헤스, 20세기의 창조자


보르헤스는 흔히 ‘20세기의 창조자’, ‘탈근대의 선구자’ 등으로 불린다. 그의 글은 최근까지 프랑스 철학을 리드한 자크 데리다, 미셀 푸코, 모리스 블랑쇼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인 존 바스, 토마스 핀천, 존 가드너와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 이탈로 칼비노 등의 작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움베르토 에코는 “두 명의 대가가 인류에게 장차 1.000년을 먹고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천년의 이미지는 바로 월드 와이드 웹(WWW)이다. 조이스는 그것을 언어로 구축했고, 보르헤스는 아이디어로 디자인하였다. 갈수록 세계는 이 속으로 빨려들고, 사물은 시각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으나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셸 푸코는 “보르헤스의 글은 지금까지 간직해온 내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말했고, 존 바스는 “보르헤스의 글은 문학의 진정한 출구에 붙인 주석서이며, 고갈된 모더니즘 문학의 탈출구”라고 말했다.

16세기 르네상스와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는 근대화를 추진했고, 세계의 중심에 ‘이성’이라는 가치를 올려놓았다. 이성은 과학기술을 중시하였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질의 풍요를 가져왔다. 또한 이성은 역사의 진보라는 낙관론적 역사주의에 대한 믿음을 배양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혁명사상, 과학주의 등이 근대화란 미명하에 전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하지만 이성은 태생적으로 분별 취사선택을 지향하기에, 필연적으로 이분법적 세계관을 낳는다. 이런 관점은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세계구성원 사이에 갈등구조를 배가시킨다.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던 ‘이성에 대한 믿음’은 생태파괴 등 근대화의 모순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점차 인류를 배반하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 오류의 근원에는, 서구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던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통렬히 지적한 사람이 보르헤스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이성에 대한 순진한 신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하는 점을 역력히 보여주었다.

 

보르헤스는 서구 지성들에게 인식의 전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핵심은 이분법적 갈등구조를 넘어서 불이법적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은 많은 지성인들에게 매우 세련된 방법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비전속에는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새로운 기술문명의 도래에 대한 전망도 들어있다. 그런데, 그런 비전을 낳은 모태가 상당부분 불교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었다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마트폰은 ‘마음’을 카피한 것이다.

 

그는 29살 때, 무아를 체험하였다. 시간이 끊어지고 세상에 대한 초월적인 관찰자가 되는 생생한 체험이 그를 서구 지성을 열광시킨 독특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불교를 통해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불교를 깊이 공부해 자신의 문학에 투영시킨 선각자이다. 그는 불교사상이 이분법적 사고로 점철된 근대 사상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단초로 보았다. 보르헤스의 이 같은 탈근대 담론은 데리다, 푸코 등 20세기 주요 사상가에 영향을 미쳤다.

 

 


보르헤스의 문학세계와 불교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보르헤스는 스스로를 ‘야생의 독자’라고 말했다. 스위스에서 코스모폴리탄이 되어 보낸 학창시절 이후, 그의 독서는 고전은 물론 수많은 이단까지 넘나들었다.

 

그는 형이상학적 오지(奧地) 탐험가였다. 남들이 미처 밟아보지 못한 정신적 고산준봉과 원시처녀림을 답사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너무나 넓은 정신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르헤스에게 서구의 이분법적 이성중심주의적 사고는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그는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관견(管見)에 사로잡혀 있는 서구 사상계를 마음껏 조롱하였다. 그리고 언어의 망치를 들고 그들의 속되고 편협된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부수는 작업을 감행했다. 알음알이(이성의 왜곡)가 얼마나 사람을 어둡게 만드는가 하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보르헤스가 근대 서구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이 대문을 들어서는 자는 알음알이를 버려라)’였다.

 

보르헤스는 지극히 현묘한 초이성의 세계를 날렵한 직관과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군더더기 없고 경쾌한 문체로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놓았다. 그는 마치 깨달음의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경이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보르헤스는 만년에 그의 고향에서 행한 강연에서 “불교는 나에게 구원의 길이었다”(<보르헤스의 불교강의>, p. 223)고 고백했다. 그는 청년기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처음 불교를 접했고, 이후 <불소행찬> 등의 불경과 파울 도이센이나 D. 스즈키의 책을 통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알레프, 소설로 그려낸 화엄법계


보르헤스의 대표작에는 불교의 영향이 선명히 배어있다. 그는 자신의 <보르헤스의 불교강의>에서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홀로 나무 아래 정좌한 싯다르타는 순간적으로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수많은 전생을 보았다. 한눈에 우주 구석구석의 수많은 세계를 둘러보았다. 그 뒤 인(因)과 과(果)의 사슬도 모두 보았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p. 93)

 

싯다르타 태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이 장면에서 보르헤스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로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제약을 뚫고 전우주적 존재로 변모하여 피안으로 도약하는 경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처님이 말한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인과법)을 이해했다. 그는 그 정각 장면을 소설화해보고 싶었다. 먼저 그는 ‘신의 글’이라는 단편을 썼다.

 

“신성과의, 우주와의 합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극히 높은 바퀴를 보았다. 그것은 내 눈앞에, 뒤에, 또는 옆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곳에 동시에 있었다. 미래에 있을 것이고, 현재에 있고,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얽혀 짜인 채 그 바퀴를 형성하고 있었다. 거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 나는 우주의 심오한 구성방식을 보았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p. 22)

 

보르헤스가 말하는 바퀴란 진리의 법륜(法輪)임이 명백하다. 위의 묘사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묘사한 화엄경 입법계품의 선재동자의 깨달음의 장면과 너무나 유사하다. 화엄경에서는 바퀴가 탑으로 비유된다.

 

“탑은 하늘과 같이 넓고 광대하다. (…) 젊은 순례자 선재는 각개의 탑 하나하나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탑들 속에서, 즉 하나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 각각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런 곳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p. 23)

 

그는 〈알레프〉란 단편소설에서 이 세상의 실상이 제망찰해(帝網刹海)의 화엄법계임을 그려냈다. 알레프는 서구 알파벳의 첫 글자로 희랍어의 ‘알파’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모든 문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지하실에서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동전 크기만 한 발광체를 보았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우주경(宇宙鏡)으로서, 앞에서 나온 바퀴나 탑의 또 다른 비유이다. 그는 마니주를 본 체험을 소설로 형상화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밖에 안되었지만, 우주 전 공간이 축소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울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그 이름을 남용하지만 결코 본 일이 없는 현현한 가상의 대상, 즉 불가해한 우주를 내 두 눈이 보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p. 27)

 

보르헤스의 서술은 소설 속의 평범한 묘사를 뛰어넘는 직관이 담겨 있다. 그것은 번개 같은 찰나에 우주의 신비를 깨친 어느 각자(覺者)의 체험이 담긴 글 같기 때문이다.



미로정원, 소설로 그려낸 ‘業사상’


보르헤스가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또 하나의 주제는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즉 ‘나는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불교적 해결인 무아사상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이란 동시에 세상이라는 연극의 배우, 연출가, 관객이라고 보았다.

 

이 사상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서구 근대철학의 핵심주제인 ‘이성을 가진 근대적 주체(modern ego)’에 대해 회의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성의 한계에 대해 비판하며, 보다 통합적인 인간성을 모색하는 탈근대적 사유가 탄생하게 된다.

 

깨달음의 세계와 함께 보르헤스가 불교에서 가장 매력을 느꼈던 주제는 윤회설과 업(業)사상이었다. 업이란 쉬지 않고 짜여지는 인연의 천 같은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보르헤스로 하여금 또 하나의 대표작인 <끝없이 갈라지는 미로정원>을 쓰게 했다.

 

그는 업이라는 그물구조에서 ‘시간의 미로’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공간적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살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업이라는 시간의 미로 속에서도 전생(轉生)하며 헤매고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보르헤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선불교라고 보았다. 그는 견성성불을 강조하였다. 때때로 난해해 보이는 그의 단편은 일종의 깨달음에 대한 문학적 화두이며, 어떤 시들은 게송(偈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일본의 한 줄 시(詩) 하이쿠를 좋아하여 스페인어로 직접 하이쿠를 짓기도 했다.

 

 

이분법에서 불이법으로


이성주의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반성이 작금의 시대적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보르헤스는 누구보다도 앞서 이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의 글은 주객 갈등의 완고한 근대적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대상에 대한 지배에 집착하고 정신분열에 신음하던 서구의 지성들에게 탁 트인 소요유와 확연무성한 불이법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보르헤스의 글을 읽고 서구가 수천 년 동안 사로잡혀 있던 이분법의 고정관념에서 깨어 나오는 암시를 받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서구의 많은 지성들이 보르헤스를 인식전환의 나침반으로 지목하고 따랐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보르헤스 사상의 밑바닥에는 불교가 연연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바야흐로 인류를 인도할 새로운 지성의 별이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다. 서구의 지성들이 깨달음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동서를 넘나든 보르헤스가 길을 열어놓은 바대로, 그 별은 포용적이고 궁극적 진리를 함유하는 불이법의 불교사상임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부처님이 제시한 그 진리가 어떻게 새로운 시대에 맞는 논리와 언어의 옷을 입고 나와서, 서구 지성까지 포함한 온 인류를 인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불교의 지성적 사명 역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 “苦 여의는 깨달음의 종교”
  - 사성제 ·팔정도 등 가르침 이해보다 체득해야


<보르헤스 불교강의>를 집필한 보르헤스는 그 내용을 압축하여 실제로 대중 앞에서 강연을 가졌다.
다음 글은 그가 1977년 7월 6일 조국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콜로세움 극장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가진 강연 내용이다.
독자들은 이 글에서 그동안의 연재를 압축·정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주제는 불교입니다.
이천오백 년 전, 네팔의 어느 작은 왕국에서 싯타르타 혹은 고타마라 불리던 한 왕자가 태어나 정각(正覺)을 이루고, 베나레스에서 법륜(法輪)을 굴리기 시작하여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불교사의 세세한 변천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저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인 불교의 핵심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합니다.
불교는 기원전 5세기에 발생하여 전 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가는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 피타고라스, 제논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불교를 서구인들에게 알린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의 타이스즈키(鈴木大拙)박사입니다.
석가가 가르친 내용이나 스즈키박사가 현대적인 용어로 소개한 내용이나 그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불교는 종파에 따라 신화, 우주론, 마술적 샤마니즘 등의 영향을 받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지만, 역시 그 근본은 공통적이며 저는 그 공통적인 면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장구한 세월을 지탱해 온 불교의 생명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불교의 생명력을 역사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작위적이 되기 쉽고 많은 논란 거리를 남길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첫 번째는 불교의 포용성입니다. 다른 종교의 포용성은 제한적인 반면, 불교의 포용성은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늘 그러해 왔습니다.
불교는 결코 쇠와 불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무력(칼)이나 종교재판(화형)으로 사람을 깨우치게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불교에 귀의했을 때,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불교신자는 개신교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고, 그외 이슬람교나 유대교 혹은 유교나 도교도 포용할 수 있습니다. 타 종교 모임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에겐 불교법회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불교의 관용성은 불교의 응집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이 관용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요가라고 부르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요가란 어원적으로 라틴어 유구(yugu)와 같은 것으로,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규율(規律)을 의미합니다.
불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2천5백년 전 붓다가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행한 설법의 내용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그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깊이 느끼는 것, 즉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종교라도 단순한 지식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져야만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붓다가 정각 후 베나레스에서 처음 설법한 내용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붓다가 깨달아 전하고자 하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팔정도까지 설명하기엔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를 살펴보는 데 주안점을 두겠습니다.
그전에, 붓다에 관한 전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선(禪)불교 신자인 어느 동양인 친구와 오랜 기간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대화를 나누어 왔습니다.
이천오백년 전에 싯타르타 혹은 고타마라 불리던 네팔의 한 태자가 살았고, 출가하여 붓다(이 말은 ‘깨어난 사람’을 의미하는데, 삶이라고 하는 긴 꿈을 꾸는 잠에서 깨어난 각자(覺者)라는 뜻입니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믿어 왔고, 지금도 믿습니다.
‘붓다’의 뜻을 말씀드리니, 제임스 조이스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사란 내가 깨어나고 싶은 악몽이다”라고 그는 말했지요.
어쨌든 싯타르타 태자는 나이 서른 살에 인생이란 잠에서 깨어나 붓다가 되었습니다.
저는 불교신자인 그 동양인 친구와 자주 토론했습니다.
“당신은 기원전 5세기에 카필라바스투 지방에서 태어난 싯타르타 태자에 대해 왜 믿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중요한 것은 진리를 깨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 천진난만한 얼굴로 덧붙이기를, 역사적인 붓다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거나 믿는다는 것은 마치 수학 공식을 공부하는 것과 피타고라스의 전기를 혼동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극동지방의 산사(山寺)에서는 스님들이 참선을 할때 몰두하는 주제(話頭) 중의 하나로 붓다의 존재를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대부분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삼위일체 중의 하나인 성자(聖子)가 지상으로 강림하여 인간의 생을 살면서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필히 믿어야만 합니다.
불교신자는 돈독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붓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붓다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 것보다는 그분이 남긴 가르침을 믿는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에 관한 전설은 너무도 아름다와서 저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