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스리랑카 불교 살린 대사건 개요
‘파아나두라 대논쟁’ 오진 스님 편역
1만여 청중을 앞에 두고 불교·기독교 교리 논쟁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던 불교 국가가 제국주의 종교인 기독교의 만용을 논파하고 정견을 드러냄으로서 호불의 재생 원동력이 되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라는 아픈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식민지배는 속성상 정치·경제적 침탈뿐만 아니라 민족성 말살도 함께 이루어진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에 있어서 그것은 기독교 전파로 실행됐다.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73년, 스리랑카의 <파아나두라>라는 마을에서 1만 명이 넘는 청중을 앞에 놓고 불교를 대표한 스님과 기독교를 대표한 두 명의 목사와 전도사가 자기 종교의 운명을 걸고 논쟁을 벌였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은 바로 그 논쟁의 기록이다.
당시 스리랑카의 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 식민지가 끝나고 영국의 지배(1796~1948)에 들어간 시기다. 지배자들은 스리랑카의 국교인 불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했다. 출생한 아이는 세례를 받지 않으면 주민으로서 등록할 수 없었고,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스님들의 탁발행을 금지하는 등 스리랑카 불교는 포교와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 때 한 스님이 기독교에 공개 논쟁을 제안한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1823~1890> 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 결국 불교와 기독교 중 어느 종교가 더 타당하고 올바른가에 대해 대중들이 검증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기독교를 대표해서는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시리만나 전도사가 나섰다.
논쟁을 위해 전용 건물까지 지은 양측은
○ 논쟁은 구술로 할 것.
○ 한 사람의 대론시간은 1시간
○ 첫 번째 시간을 기독교 측에 부여하고, 그 시간은 불교의 허위성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고.
○ 다음 시간은 불교 측에서 기독교 측에 대해 답변한 다음 기독교에 대한 허위성을 대론치 않으면 안 된다 등, 10개 항목의 협정서를 교환하고 모두 다섯 지역에서 교리의 우열을 가리는 논쟁을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의 5대 논쟁 가운데 파아나두라 마을에서 행해진 논쟁이 가장 치열했다. 이 책은 바로 그 파아나두라에서의 논쟁을 담고 있다. 파아나두라에서의 논쟁은 상대 종교에 대한 공격과 그에 대한 반론 그리고 자기 종교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주제는
○ 영혼의 문제,
○ 육체와 정신,
○ 죽음,
○ 교주의 전지 전능성,
○ 교주의 지혜,
○ 교리상의 허점,
○ 수미산의 존재 여부,
○ 경전에 대한 신뢰성 등...
폭넓게 주어졌다. 식민지 지배와 결탁해 선교하는 기독교와 불교를 신봉하는 스리랑카 민족과의 ‘격돌’이기도 했다.
결국 불교의 승리로 끝나지만 이 논쟁의 가장 큰 성과는 스리랑카가 지금까지 불교국가로 명맥을 잇게 하는 한편 남방상좌부 불교의 재생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 1. 1873.8.26/오전 08시-09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의 첫 연설.
1872년 6월 12일, 저는 웨스린교회에서 불교 경전이 중생의 영혼에 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 19일 어떤 불교 포교사가 저에게 와서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두 번에 걸친 설교에 관해서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전에 말씀드린 설교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까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에 조금이라도 반대 의견이 있으면 사양 말고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청중이신 여러분들이 기독교와 불교 양측 중 어느 쪽이 타당한가를 판가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사람들의 영혼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행한 자들이 그 행위 결과에 관계없이 어떠한 과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불교인들이 신봉하는 불교 경전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상유타 니카야(상응부 경전)>라는 경전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다섯 개의 개체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즉, 그것은 루파스칸다(rupaskanda, 신체), 베다나스칸다(vedanaskanda, 감각), 산냐스칸다(sannaskanda, 생각, 상념, 想??), 산카라스칸다(sankaharaskanda, 외부 반응에 대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지를 중심으로 한 모든 의식), 빈냐나스칸다(vinnanaskanda, 마음, 의식)를 말합니다.
또한, "집착(upadana, 애착)"도 5종류로 분류하며 "중생이라는 존재는 이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상유타 니카야>뿐만 아니라 불교 경전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즉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는 모두 괴로움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표현은 스리랑카에서 극히 보편적으로 읽히고 있는 <카비야세카라(Kavyasekara)>라는 유명한 시편에도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중생은 12처로 분류된다고 하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인간은 육체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은 감각, 두뇌에 나타나는 이미지, 인식이라고 하는 세계를 가라키며, 그렇게 때문에 4개의 개체, 다시 말해서 물체(rupa, 色), 감각(vedana, 受), 생각(sanna, 想), 외부로부터의 인식(sankhara, 行)은 마음(정신)과 육신(nama rupa, 名色)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마음 또는 정신(nama, 名)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각(感覺)과 지각(知覺) 및 차별(差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육신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 또는 육체(rupa), 마음(citta, 心), 마음의 움직임(cetasika)"이라고 <미린다 팡하>라는 경전에서도 육신과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상유타 니카야>에 있는 문장에 의하면 "의식(vinnana, 意識)은 육신과 마음에서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스리랑카에서도 불멸의 고전적인 시편인 <카비야세카라>라는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이 시편에 의할 것 같으면 "마음과 육신, 이 두 가지 외에 인간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여러 설에 의하면 사람들이 인식을 할 때는, 인식하는 그 순간 모든 구성 요소가 한 번에 구성되어 진다는 것은 명확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성은 다섯 가지의 집합체(集合體), 12처, 혹은 마음과 육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타(佛陀)는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육신은 영혼이 아니다"라고 하며, <상유타 니카야>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쳐서 육신 등은 결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집합체, 즉 5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육신의 6개의 감각기관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그는 죽음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생전에 모두 사용해 쓸모없는 육체가 다시 똑같은 새로운 물건으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죽으면 이 육체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합니다.
또 <상유나 니카야>에서는 "이 육체는 전부 멸하여 없어진다. 그러므로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멀리 떠나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하프라다나(Mahapradana)>라는 경전에서는 "생겨난 모든 사물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결과에 비추어 볼 때 불교의 영혼 부정설을 알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인간들이 생존 시에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은 죽음과 동시에 일체가 소멸되며, 인간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개구리.뱀.돼지.말 등으로 다시 태어나서 생존하며, 그러한 동물로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주인이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인간들이,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의 동물이나 곤충보다도 그 가치가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조금이라도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종교라고 신앙하겠습니까?
만약 인간이 동물이라면 축생으로서 생활하지 않고 왜 종교를 구하려고 하겠습니까? 불타의 가르침에 의하면 불교에서는 축생도에 있던 동물들도 천국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왜 지금 현재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동물들에게 설법을 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동물들은 동물에 불과하며, 인간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인간인 것이지 결코 동물이 인간으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불교는 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지금도 늦지 않으셨으니 이와 같은 사이비 종교를 멀리하시고,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계시하신 신성하고 진실 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찰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명시하고 있는 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서 그 한 예를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자기 옆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오늘 중으로 나와 함께 천국으로 간다."
또 성서에서 스톤(Sthone)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주여.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5장 제3절에서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을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그리고 같은 빌립보서 제1장 23절에 의하면
"내가 이들 두 사이에 끼여 있다. 내 욕망을 말하면 이 세상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며, 실은 그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약간의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이외에도 더 많은 증거들이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충분하게 입증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이에 반해, 불타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과보를 받지 못한다."
선악의 행위에 의해서 받는 보은과 죄업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받는다고 합니다.
<미린다 팡하(미린다 왕문경)>에서 미린다 왕이 비구승려 나가세나에게
"이 몸을 떠나서 또 다른 몸으로 옮겨지는 영혼(satta)이 존재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나가세나는
"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지금 현재의 육신과 마음으로 행해진 선행 또는 악행위에 의해서 다른 새로운 정신(nama, 名稱)과 육신(rupa, 形態)에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행한 죄업으로 인해서 일어난 오온(五蘊)은 그 전생에서 끝나 버리고 전생에서 금생으로는 아무 것도 오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저지른 선행 악행의 결과로서 다른 육신과 정신(마음) 혹은 다른 인간으로 출몰합니다. 5온과 12처는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온 12부터 그 어느 하나도 그 당사자와 함께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것도, 또 소멸되는 것도, 그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의 인용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여러분들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그 사람의 일체의 존재가 소멸된다는 것을 불타는 명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리를 인정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많은 재산으로서 아무리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해도 그 어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생존 시 쌓은 공덕은 전혀 무의미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가르침이 올바른 교리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비행의 악습을 행하는 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범죄를 자행하는데 더욱 더 자극적인 교리가 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악행, 즉 살인·강도 등의 범죄를 자행하는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비행에 조금도 양심을 가책이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며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며, 그것도 그 비행에 의한 나쁜 결과는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받는다면 누가 불교를 믿지 않겠습니까?
만약 악행을 자행하는 사람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이 세상에는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고 암흑의 세계로 변해 버리겠지요.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벌을 받아야 된다면 그것은 그 어떤 사람이 아닌 그 자신, 즉 악행을 자행한 그 사람뿐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아서 악행을 자행하라, 선행을 하지 말라고 권장하는 종교를 어떻게 진정한 종교라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자기모순을 정당화시키려고 불교도들은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불타는 중도(中道)를 설했노라고 그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들의 그러한 노력의 실제 예를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조용히 끝까지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사의를 표하면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는 그의 연설을 마쳤다.)
☞ 2. 1873.8.26/오전 09시-10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의 이론에 대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발표한 불교의 비판은 처음부터 인정될 수 없는 반론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들이 그의 반론을 듣고 진정으로 이해를 했는지는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반론으로 제기한 불교 경전의 인용문에 대해서 큰 착오가 있었음을 미리 밝혀 두며 인용한 문장의 의미, 혹 사상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한 예를 든다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부분은 사람이 죽을 때 그 움직임을 중지하게 되며, 그 때문에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하고 여러분들 중에 몇 분께서는 벌써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도 똑같은 생각이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발론하고자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사람이 죽을 대 금세(今世)와 내세(來世)에 오온으로부터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오고 가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의 오온으로부터, 죽는 사람과 함께 내세에 아무 것도 가지 않지만, 죽은 자 대신에 저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죽은 자 그 자신인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가르침은 대단히 난해하며 그것은 파알리(Pali)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는 파알리어를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한 그의 무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저서인 <그란타세카라(Grantha-sekara)>라고 하는 책을 보기로 합시다. 이 책에서 신약성서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4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파알리어의 문장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어를 단 4개밖에 사용하지 않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틀린 문법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문장은 "티와나모 파칫토호투(tava namo pachitto hotu)"라는 문장으로서, 파칫토(pachitto)라고 하는 파알리어의 단어는 없습니다. 그것은 파윗토(pavitto)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와나모(tava namo)라고 남성명사를 사용한 것도 틀린 것입니다. 그러한 짧고 단순한 문장도 정확히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어느 정도로 파알리어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문법에 틀림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하시더라도 여기에 배석하시고 계신 유명한 파알리어 학자이신 스님들은 이미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파알리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온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가소로운 일아 아닐까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온(色蘊, Rupaskandha, 육체),
수온(受蘊, Vedanaskanda, 감각, 지각),
상온(想蘊, Sanna-skandha, 인식, 견식),
행온(行蘊, Sankharaskanda, 식별력), 그리고
식온(識 , vinnanaskandha, 외면적 자각)을 말하며, 색온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이는 육신이라는 의미이며, 수온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 육체적인 형체는 남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묘지까지 가지고 가서 묘를 만드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즉 수(受)는 다시 말해서 고(苦)와 락(樂)을 의식하는 동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저 세상에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대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남이 아닌 그 자신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혼(魂)이 육신에서 빠져나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안에 있는 혼은 인간의 영(靈)이라고 우리들은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해 천국으로 간다면 천국에 거주하는 영은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계신 목사님이 이 장소를 떠나서 웰라왓타에 간다고 합시다. 그는 그곳에 간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웰라왓타에서도 그는 그곳에서 알려져 있는 똑같은 이름으로써 불리워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이 만약 육체를 이탈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이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는 또 하나의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은 모세(Moses)와 그 외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께서 보시는 이 손에 든 성경책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본래의 성경책으로부터 전혀 다른 책으로 변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변형된 성경으로부터 수많은 변형과 변형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내용에 관해서는 크게 변함이 없으리라 봅니다만 이 성경책 본래의 글자나 페이지 수 등은 변형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대로이나 그 이외의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죽은 후 이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부분 혹은 몸의 어느 일부분이 저 세상으로 가지 않아도 죽은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있으니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가는, 즉 윤회(transmigrate)하는 인간은 동일한 인물인가, 그렇지 않은가? 동일한 영혼(identical soul)이 어떤 것은 인간으로 윤회하고 혹은 신으로 또는 천신과 다른 존재로 윤회하는가?
만약 동일한 인간이 이 세상에 죽어 저 세상으로 윤회한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죽음도 없는 것이며 살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살생을 해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는가."(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이 세상에서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는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그와 동일한 사람 혹은 생명체의 존재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임.)
이 인용은 파알리 삼장(三藏) 중 논장(論藏)의 하나인 <아비담마 피타카(Abhidhamma pitaka)> 카타왓투(Ka-thavatthu, 論事)에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인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천국에 체재하는 것은 우리들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에 반해서 만약 천국에 있는 자들이 모두 신(God)이라 하면 인간이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틀린 논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보아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에는 하나님과 같은 영혼이 존재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만약에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즉시 직접 천국에 가는 불멸(不滅)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살인 범죄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에게 불멸(不滅)의 생명 혹은 그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 순간 죽어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히 죽는 죽음입니다. 마음속의 모든 사고방식은 순간적으로 생(生)하고 또한 순간적으로 멸(滅)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난 생각이 사라진 뒤에 일어나는 생각은 결코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각이 일어나며 또한 소멸되는 것을 순간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육신은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하며 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서른 두 가지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일주일에 반 인치 정도 자라는 머리카락이며, 머리카락은 자라면서 흩어져 없어지기도 하고 뽑히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빠르게 자라는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고 혹은 자연히 빠지고 하는 것이 없이 오직 자라기만 하고 빠지지 않는다고 하면 1년에 자라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상당히 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은 결코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있던 그 머리카락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전체의 다른 부분도 생(生)하고 자라며 또한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색온에 포함되는 부분 혹은 물질적인 육신은 순간적인 죽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늙은 후 혹은 육체의 모든 감각 기관이 힘을 전부 써 버린 후에 일어나는 현상을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죽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옛날의 심식(心識)은 다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심식이 생기게 되는데,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식은 쇠사슬의 고리(link)와 같이 중간에 끊이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영혼을 갖는다고 하면, 그리고 이 영혼이 천국으로 모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영혼일까요? 그것은 자른 통나무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과일과 같은 것일까요? 혹은 계란과 같은 것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우리 기독교의 목사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체가 저 세상을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목사님은 인간이 이 육체에서 떠나서 천국으로 가는 불멸의 보배,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말씀하신 영혼이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다른 곳과 함께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정지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저는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을 금속으로 만든 용기에 넣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통조림통과 같이 한다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은 그 용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곳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는 다른 좋은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영혼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간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죽은 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불타께서는
"자기 자신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인용에 의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죽어 가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변화되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죽어간 사람 그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착한 행위 혹은 나쁜 행위의 결과를 저 세상에서 보은(報恩) 혹은 벌(罰)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더 많은 증거로서 증명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금후 다시 말씀드리기고 하겠습니다.
이상은 데이비드 목사가 불교에 반대해서 말한 질문에 대답했고,
이하는 구나난다 스님이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시작함.
불교를 반대 공격하기 위해서 목사님께서 이 앞에 한 시간 동안 예를 들며 말씀하신 질문들은 제가 대답한 것으로 인하여 모두 논파되어 버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직도 말하고 싶은 것은 태산과 같이 많습니다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아직도 저의 시간이 남아 있게 때문에 지금부터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기독교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진정한 민중 구제의 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제일 간단명료하게 납득시킬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20장의 왜냐하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의 질투하는 하나님>에서 '질투하는', 즉 젤러스(jealous)라는 말이 싱할라어로 즈와리타 데비요(Jwalita Deviyo)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찬란한 신>입니다. 이 번역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젤러스라는 것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젤러스라는 것은 ‘질투가 심하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두 가지의 말을 정확하게 싱할라어로 번역한다면 그들이(기독교 목사) 일반 민중들을 속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서 사람들을 옳지 못한 길로 유도하는 것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들을 번뇌에서 구제하기보다는 이미 신앙하고 있는 종교에서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改宗)시키려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갖게 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증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인도 켈커타의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신(神), 즉 하나님을 이슈와라(Iswara)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힌두교도들이 숭배하고 존경하는 신이 이슈와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도들도 그들의 하나님을 이슈와라라고 이름하여 불렀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도의 어떤 시의 한 구절인 "이슈와라이카 수테 크루스테(Kswaraika sute kruste)"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싱할라 민족도 데비요(Deviyo, 神)들에 대해서 대단히 존경하며 숭배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나라(스리랑카)에서는 여호와(Jehovah)를 데비요(Deviyo)라고 이름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기독교 전도 집회에서 사실과 전혀 다른 잘못된 해석의 설교를 하는 것이 극히 일반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깨끗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여 포교를 하는 것은 자기들의 종교에 다른 종교도들이 많이 개종할 것을 기대하는 속셈이 있어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성경 본래 내용의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증명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레위기 제17장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마귀들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인용은 1840년에 싱할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발행한 성경에서는 똑같은 문장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네들이 성경에서 삭제한 것은 어쩌면 이 문장에 의해서 기독교도들이 마귀들에게 제사를 행했을 것이라고 믿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변형·삭제 시키는 것은 기독교도들 속에서 늘 행해졌던 사실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저는 로마의 카톨릭교도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문장을 그렇게 변형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또 다른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6장 제6절에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을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호와가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 것은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장래의 걱정거리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일체의 지자(知者)이시며 또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장래의 걱정거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을 보아도 여호와는 미래를 보는 성스러운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한 어떠한 일로 후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전지전능한 자로서, 그리고 우주의 창조자로서 믿고 의지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가 옳지 못한 종교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께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12장 23절과 24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집트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안방과 좌우 기둥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는 무엇인가 어떤 표적이 없으면 이집트 사람의 집을 분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님이 길을 걷기 위해서 어떠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도 집안에 살고 있는 이집트인들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그것을 증명할 만한 표시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런 극히 일반적인 지혜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을 전지전능한 신으로서 믿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인용에 대해서 우리의 친구인 목사님께서 그것을 기독교의 죽음의 표시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하고서 그대로 넘겨 회피하려 하지만 저는 결코 그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서,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4장 제9절에 <만약에 그들이 이 두 기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여호와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의심이 없었다면 <만약 처음의 표시를 믿지 않았다면 후의 표시를 믿을 것이다.>(출애급기 제4장 제8절)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아도 여호와는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여호와는 자기의 신성한 지혜에 결점을 더한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사사기(士師記) 제1장 제19절을 잘 들어주십시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撤兵車)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유다와 같이 있던 여호와는 그들이 철로 만든 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자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신앙이 얼마나 유치한 것입니까!
철(鐵)을 무서워하는 것은 스리랑카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하나의 습관인 것입니다. 만약 어두운 밤에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라든가, 혹은 음식을 가지고 갈 때는 음식과 함께 철로 만들어진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는데, 그것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스리랑카 민족의 관습인 것입니다.
또 한약처럼 달이는 약일 때에는 그 달이는 용기의 겉 부분에 어떤 철물을 실로 묶어 놓고 약을 달이곤 했는데, 그것은 악령(惡靈)들의 악행의 침해를 막기 위해서 행하는 수단인 것입니다. 만약에 여호와가 철제품을 무서워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명확한 해답을 얻으셨으리라 믿기 때문에 저는 이곳에서 누누이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어떠한 자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예를 기독교 성경에서 인용하겠습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제4장 제24절과 25절에는 <여호와께서 어떤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시어 그를 죽이려 하는지라, 그것을 보고 있던 십보라(모세의 부인)가 예리한 차돌을 가지고 그 아들의 표피(남자 성기의 겉 표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의 남편이로다.’ 하오니 그를 놓아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볼 것 같으면 여호와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으로 선정된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부인 십보라는 자신의 아들 표피를 잘라서 자기의 남편인 모세를 구했던 것입니다.
저는 청중이신 여러분들께서 할례제(Circumcision)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지금의 저로서는 그것이 간단치 못한 것이 극히 유감입니다. 그 의례(儀禮)는 마호메트교(이슬람교)도들 가운데에서 어린애가 처음으로 마호메트교에 입문할 때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십보라로 부터 그 아들의 표피를 받은 후 모세를 놓아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스리랑카 민족의 관습 하나를 보면, 만약에 어떤 사람 누군가가 악령(惡靈)에 걸려 있다 하면 그 악령에게 닭을 헌납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때 그 닭 전체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닭의 숱만을 잘라서 악령에게 헌납하며, 양을 헌납할 때도 그 양을 통째로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 양의 귀한 부분을 잘라서 악령에게 헌납하여 제사를 지내서 악령에 걸려 있는 자를 구하곤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십보라가 자신의 아들 표피를 잘라서 여호와께 헌납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신앙하고 있는 그 특색을 아는 것은 우리들로서는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부 소비했기 때문에 이만 끝마치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또 하나의 문제점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대단히 모순투성이며 부정적(否定的)인 종교이고, 여기에 비해 불교는 얼마나 올바른 종교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음 목요일에도 이에 관한 것을 두세 가지 더 말씀드릴까 합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對論)을 마치다)
☞ 3. 1873.8.26/오후 15시-16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의 두 번째 대론.
저의 대론자(opponent, 敵對者)인 불교도가 저의 저서인 〈그란타세카라〉를 비판한 것은 적당하지 않았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 인용된 파알리어 문장은 제가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문장은 버마(미얀마) 글자로 출판되어 있는 신약성서의 버마어역인 것입니다. 제가 버마 책에서 인용한 것은 〈그란타세카라>책 제명이 있는 첫 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대론자인 승려는 영혼(soul)을 쇠그릇 속에 집어넣으면 영혼이 그곳에서 정주(定住)한다고 말했습니다만 번갯불은 바람보다 빠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어떠한 용기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못하게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도 번개와 같이 빠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영혼을 정주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의 대론자는 또 인도의 기독교가 여호와를 <이슈와라>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그것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만, 이슈와라라고 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의미로서 우리들의 여호와를 <이슈와라>라고 부르는 것은 극히 당연하며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전지전능(omnipotent)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친구인 승려는 좀 더 깊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 지적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승려는 우리들의 데비요(스리랑카어로 神을 의미)라고 하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만 전혀 당치도 않은 것(nonsense)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신앙하는 여호와에 대해서 "데비요"라고 하는 말 이외에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빛나는 여호와: shining God: Jwalita Devi-yo>라는 말의 사용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올바른 비판이 아닙니다. 어떠한 단어의 의미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파알리어 성전 율장(Vinaya pitaka, 律藏)의〈마하밧가(Mahavagga, 大品)〉에서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는(중성) 사람이 만약 비구승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면 비구승의 자격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를 승단에서 파문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세 탓보(nase tabbo)라고 하는 것은 ‘죽여버려야만 한다’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살생을 절대 금하고 있는 불타로서는 그 의미를 살생으로는 말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서 양성(兩性), 다시 말해서 남녀가 동시에 가능한 사람이 만약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구승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의 가사를 벗기고 승복을 벗겨야만 한다는, 즉 이는 속인으로 만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파알리어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단어 및 문장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레위기 제17장 제3절 7의 문장도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 다른 곳에 옮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잘못된 것(fault)을 지적해 낼만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곳을 지워 버렸다고 승려가 말한 곳은 성경의 다른 곳에 틀림없이 옮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번역은 두 번째의 번역이 첫 번째의 번역보다 훨씬 훌륭한 것입니다. 때문에 승려가 성경의 번역자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은 적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6장 6절 후회(repentance, 後悔)라고 하는 의미는 히브리어의 <참회: nogama, 懺悔>라고 하는 의미로서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의미는 무신앙(無信仰)의 의미입니다. 〈수다르마 프라카라나야(sudarma prakaranaya)〉라는 책에 참회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그는 책의 그 부분을 읽음.)
출애굽기의 제12장 23절(싱할라본, 영문본 모두 12장 23절오 되어 있으나, 성경에 대조한 결과 12잘 22절이 옳음)에 ‘문 안방과 좌우 문설주에 피로써’ 표시한다고 적혀 있는 것에 관한 승려의 의견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명령한 것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하고, 이집트인이 벌을 받게 될 것을 명령에 따라 실천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전멸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기독교의 죽음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 반대해서 질문한 승려의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하는 불교에 반대 대론 시작.
불교가 어느 정도 부정한 종교인가를 입증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잘 들어주십시오.
불교에서 연기설(緣起說, Paticca samuppada)은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인 줄 압니다. 그 가르침은 대단히 복잡하고 알기 어렵습니다. 〈상유타 니카야〉라는 경에 나오는 연기설에 대한 부분을 지금 여기에서 인용하겠습니다.
"무지(無知)에 의해서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동작이 생기며, 그 동작에서 식(識), 다시 말해서 의식작용이 일어나며, 그 의식작용인 식에서 명색(名色), 즉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이 생겨난다."라는 것입니다. 형체가 있는 물질과 마음이라는 것은 오온(五蘊, panca-kkhankha)인 것입니다. 식은 또한 오온 가운데에 포함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복잡한지 아시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동작에 의해서 식 혹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식에 의해서 마음과 물질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식은 또 마음과 물질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식은 또 마음과 물질 가운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생기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생긴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불타의 가르침이 훌륭합니까? 어느 누구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치에도 맞지 않는 가르침을 이성(理性)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옳다고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마음과 물질에 의해서 6식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표현이 올바르다고 하면 모든 유정(有情)들이라고 하는 것은 눈·귀·코·혀 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각 기관·눈·귀·코가 없이 마음과 몸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문장보다 어렵고 복잡한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여섯 개의 감각 기관(6근)에 의해서 촉(燭)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상유타 니카야〉에 의하면 촉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만약에 이 논리가 맞는다고 하면 앞에서 말한 그 표현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양쪽 그 어느 쪽도 맞지 않는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불타 이외의 누군가가 그처럼 곤란에 처해 있었을까 당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가르침을 심원(深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곧바로 알 수 없는 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뿐입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을 심원한 것이라는 소문만을 듣고 그것을 믿고 신봉하는 불교도로서는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겠지요.
또 "파사 팟치야 베다나(Phassapaccaya Vedan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접촉에 의해서 감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육체라고 할 때는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겨나고,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여기서는 감각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표현 중에서 어느 하나가 올바른 표현이라면 반드시 그 하나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끝맺기 전에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연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수(受)에 의해서 애욕(愛慾, tanha)이 생기며, 애욕에 의해서 집착(執着, upadana)이 생기며, 집착에 의해서 태어남(生, jati)이 생기며, 태어남 혹은 생에 의해서 다시 태어남이 생긴다 합니다. ‘태어남이라 함은 물질(khandha)과 감각 기관에 의해서 성립된다.’라고 의미로서 불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의해서 선과 악의 행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식에 의해서 육체와 마음이 생긴다고 말하며, 그 식과 육체와 마음이란 것은 오온(五蘊) 가운데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또 선과 악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식’이라는 것을 피할 수가 없으며, ‘식’에 의해서 몸과 마음도 생기며 다음에 또 업(業)에 의해서 온(蘊, Skanda)과 육신과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만약에 저의 대론자(불교 대표자)가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난해한 곳을 해명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으시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그가 청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앉았다.)
☞ 4. 1873.8.26/오후 16시-17시까지- 스님의 대론.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불교에 반대해서 말한 대론자를 목사님(Pakili Unnanse)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에 대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저를 ‘위룻다카라야(적대자(敵對者)’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이 사람을 ‘적대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혹시 제가 ‘적대자’라고 말할 때는 이 목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대론을 시작하기 전에는 우리들 사이에 아무런 유감도 적의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독교 측에 처음으로 질문한 것은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을 용서치 않는’에서 ‘젤러스(Jealous, 질투하는)’라는 단어에 관한 해석의 문제였습니다만 그는 거기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고서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적당히 얼버무려 버린 것은 그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의 싱할라어 번역이 올바르다고 말하기 위해서 그가 말한 해석도 전혀 옳지 못한 판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840년에 웨스리얀 전도협회에서 발행된 성경의 싱할라어 번역에 있는 어떤 단어를 같이 회사가 그 후에 발행한 성경에서 삭제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 문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경의 번역자는 대단히 숙달된 자격으로서 아무도 그의 결점을 말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하며 그 누구도 그를 비판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대답 또한 전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번역자가 모두 동일한 지혜를 갖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며, 때문에 그들이 번역을 할 때 문장을 변형시킴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성경 중에서 어느 성경이 올바르다고 우리들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카톨릭에서는 성경이 올바르다고 우리들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의 카톨릭에서는 성경을 변형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존 전승시킨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인도 켈커타의 기독교 전도협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슈와라`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그 나라의 힌두교도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저의 대론자의 대답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이슈와라`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힌두교의 신에 대해서 사용하므로 신(神)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인도인을 속이기 위해서 기독교가 그들의 신도 `이슈와라`라고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고 봅니다.
만약 기독교가 `이슈와라`를 신앙한다면 그들의 신 여호와도 `우마양가나(Umayangana)`라고 하는 부인(婦人)을 데리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도 부인을 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앙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부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6장 제6절에서 여호와가 대지 위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그 후에 걱정을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떠한 일의 결과를 뻔히 알면서 그 일을 행하여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만이 하는 짓인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하여서도 목사는 타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최근 기독교인과 불교인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발표한 책인 〈수다르마 프라카라나야〉의 한 부분을 낭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낭독한 것만으로는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목사도 저도 책을 낭독하는 것만으로 대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 상기의 책에 기술되었던 모든 질문에 대답해서 기독교도들의 모든 쟁론을 저는 모두 타파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이 논쟁의 대응 자료로서 가지고 나오는 것은 그의 무지의 소치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기가 구별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인에게 자기의 집 문설주 위에 어떠한 표시를 하도록 명령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만약에 여호와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그러한 표시를 하도록 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해 목사는 그것을 기독교의 죽음의 상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 또한 전혀 올바르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을 때 문설주에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인의 첫아들(장자)를 죽이기 위해서 여호와(영역본에는‘예수’라고 했으나 ‘여호와’의 잘못임.)가 갔을 때 피로써 표시를 한 집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로부터 무엇인가 결정하기 위해 어떠한 힌트가 필요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님이 길을 걷기 위해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과 같은 여호와도 이스라엘인의 집을 구별하기 위해서 어떤 표시가 필요했다는 것은 전지전능한 여호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여호와는 모세에게 처음의 표시를 믿지 않았다면 두 번째의 표시를 믿으라고, 혹은 두 번째의 표시를 믿지 않았다면 세 번째의 표시를 믿으라고 말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여호와는 미래를 보는 지혜의 눈이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가 물어 본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하여 목사는 아무 것도 타당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유다(Judah)가 있던 전쟁터에서 여호와가 철로 만든 마차를 겁을 낸 것에 대해서도, 또한 모세 아들의 음부(陰部)끝 껍질을 잘라서 여호와에게 올린 것에 대해서도 저의 대론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떠한 쇠붙이를 무서워하는 것은 악령들이라고 했고, 피를 대단히 좋아하는 것은 말할 것 없이 악마들이 하는 짓이라고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여호와가 모세의 아들에게 행하였던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인간의 피를 대단히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 반대해서 예를 든 질문에 대해서 기독교 측에서 제공한 대답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불멸의 영혼이 불교가 말하고 있는 영혼과 틀리다면 도대체 어떠한 영혼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집하고 있는 한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겠지요.
우리들의 신체를 형성하고 있는 5가지의 부분인 오온(五蘊)에 대한 가르침은 일반적인 지식으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또 모든 생명이 있는 물체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도 간단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다음 세계에 지금의 신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의 어떤 것도 가지고 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사람 대신에 저 세상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결코 타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상세히 말씀드리기 위해서 불교 경전 중에서 죽음과 태어남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여 말씀드릴까 합니다.
‘햇볕에 널려 있는 큰 나무 잎들이 푸른빛을 잃고서 점점 그 빛이 퇴색되어 하얗게 되어 가는 것 같이, 죽음에 가까운 사람의 감각 기관도 점점 약하게 된다. 이 같이 되어 그는 청력, 시력 그리고 세 개의 감각이라는 것은 카인드리아(Kayindriya, 身根) 만인드리야(Manindriya, 意根), 그리고 지비타인드리야(Jivitaindriya, 命根)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신체, 마음, 생명이라고 하며, 카인드리아는 육체의 어느 부분에 무엇인가 닿았을 때 그것을 느끼는 능력이며, 만인드리야는 모든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이며, 지비타인드리야는 우리들의 생명을 지키는 능력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감각 능력이 마음으로 들어가 버린, 즉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은 두 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는 업상(業相)과 또 하나는 취상(就床)이다.
업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행한 어떤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의한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죽음에 이른 사람이 꿈을 꾸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만약 죽어 가는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악한 행을, 다시 말해서 살생·도적질 등을 계속해 왔다고 하면 죽는 순간에도 살아 있던 당시의 악행의 죄상을 볼지도 모른다. 만약에 좋은 일을 행한 사람이라면 죽는 그 순간에도 자기 자신이 행한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을 볼 것이다.
만약에 죽는 사람이 좋은 현상을 본다면 그는 천국(devaloka, 梵天)에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쁜 현상을 본다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업상의 현상을 본 뒤 그는 저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인데 저 세상의 현상이라는 것은 다시 태어날 세상인 것이다. 저 세상의 현상을 본 뒤 그는 그것에 집착(tanha)하며, 이 현상에 대한 집착이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세상을 떠나가는 의식과 함께 죽는 그 순간에 다시 태어나는 의식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저 세상에 가는 그 어떤 것도 이 몸에 남을 이유가 없다. 죽는 사람이 위와 같은 현상을 볼 때, 애욕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은 그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타인이 아닌 본인 자신인 것이다.
나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가 지옥 혹은 다른 최하의 곳에 태어나는 것의 표적인 것이다. 천국에 태어나는 사람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 혹은 좋은 환경과 다른 많은 즐거움만이 있는 현상을 보게 되며, 또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무섭고 험한 세상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을 봄으로써 죽는 사람이 다시 태어남을 알 수 있는데, 불타는
"윤회 속에 존재하는 자는 그 시작도 끝도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 속에 있는 자들은 모두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계속해서 돌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위의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을 찾아보면, 구약성서 창세기 제2장 제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 living)이 된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문장에서, 다시 태어난 인간은 대지의 흙으로부터 최초의 인간인 아담(Adam)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생기를 아담의 콧속에 불어넣은 것과, 또 그것에 의해서 그의 생령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의 콧속에 불어넣은 생기는 결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한 생기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breath)를 받았기 때문에 아담의 생령이 인간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기는 그들의 양친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양친 부모들은 또한 그들의 선조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생기는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아담의 생기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생기를 원점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시작이라는 극단(極端)의 표현이 아닌 영원한 여호와의 생기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의 시작이라는 극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생기는 시작, 즉 처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신체와 영혼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영혼에는 시작이라는 극단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불법이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앙하고 있는 여호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사사기 제11장에 ‘입다가 불에 구운 목을 여호와께 공물로 바쳤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입다가 그의 딸의 목을 잘라 불에 구워서 여호와 하나님께 올리는 예식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같이 불에 구운 것을 여호와께 올렸다고 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성경에서 충분히 입증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아서 여호와가 얼마나 인간의 피를 좋아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와 같이 인간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공물(供物)을 올리는 것에 대해, 그와 같은 비인도적인 공물을 좋아하는 자가 그 누구인가를 제가 그 이름을 들추지 않아도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아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만 3일 동안 무덤 속에 있었다고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27장 63절∼66절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예언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또 마태복음 제28장에는 ‘그리스도는 금요일 무덤에 매장되어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한다.’고도 실려 있습니다.
저의 대론자인 목사께서 이 점에 대해서 대답을 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이 질문은 영국의 대학자인 부레드로우가 어느 중요한 모임에서 기독교에 반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국의 신문에도 발표됐습니다. 그 질문을 했을 때 그곳에는 비숍 클라우톤(Bishop Cloughton)이라는 대단히 고명한 학자도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흉조라든가 아니면 길조의 현상들을 잘 믿어 왔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좋은 징조가 보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쁜 징조가 나타난다는, 길흉의 징조에 대한 입증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 인도에 살고 있던 <빈비사라>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의 첫 번째 부인이 임신을 했을 때 자기 남편 즉 왕의 피를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왕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려서 부인에게 피를 먹게 해주었고, 소원대로 피를 마신 부인은 왕자를 낳았습니다. 후에 그 왕자는 자기의 아버지, 즉 빈비사라왕을 죽이고 자기 자신 스스로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나쁜 징조가 일어난 후, 즉 흉조가 발생한 뒤에는 반드시 흉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기의 성인이라 신앙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을 때도 좋지 못한 징조가 발생했습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2장 제16절에,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 안에 살고 있는 2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다 죽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울고 웃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 죄도 없는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을 죽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문이었습니다.
반대로 불타가 탄생하였을 때는 그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있었다고 전하지 않습니다. 석가모니 불타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크게 나누어 잉태(孕胎), 탄생(誕生), 성도(成道), 초전법륜(初轉法輪)등 인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많은 좋은 징조들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환희심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즉 귀머거리는 귀가 들리게 되고, 장님으로서 세상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은 밝은 세상을 보게 됐으며, 걷지 못하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병이 나아서 즐거움을 금치 못하며 걷게 됐으며, 화염 속과 같은 지옥불이 꺼졌으며, 아귀들은 굶주렸던 뱃속을 그득 채웠으며, 불치의 환자들 모두가 자연히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불타의 탄생시 발생한 서른 두 가지 길조 중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좋은 징조는 불타가 이 세상에서 대단히 좋은 일을 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시켜 준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탄생시 발생한 많은 징조들은 그 어느 하나도 길조는 없었으며, 다만 불쌍하게 천진난만한 어린 아기들을 죽인 잔혹한 일들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시 흉조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이상한 종교를 가르쳐 우리들을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귀의해서는 좀처럼 우리 인간들이 구제를 받기가 어렵다는 점을 깊이 통찰하시어 주의하시기로 합시다.
불타의 탄생시 최소한 개미 한 마리라도 죽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 누군가가 있다고 하면 저는 불교의 신앙을 버리겠습니다.
기독교는 우리들의 친척이 아닙니다. 불타도 우리들의 친척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의 종교 중 어느 하나가 진정 올바른 종교라고 하는 것이 판명 된다면 그 올바른 종교의 창시자는 우리들의 친척이며, 위대하신 지도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를 찾기 위해서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잘 들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을 마침)
☞ 5. 1873.8.28/오전 08시-09시까지- 시리만나 전도사가 대론.
어떤 사람이 열병에 걸렸을 때는 입맛을 잃어버려 그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대론자는 이교도(異敎徒)인 이상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리가 만무합니다.
기독교 공부를 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기독교에 반대해서 불교가 내세운 내용이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몇 주간의 짧은 시간밖에 공부하지 않은 소년들도 간단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설명에 대하여 제가 대답하기 전에 저는 불교도에 반대해서 기독교 측에서 내놓은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올바른 대답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불교도 대론자의 대답은 기독교 측에서 내놓은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그 참 뜻 몇 가지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불교도들이시여! 불교에서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부분(오온)은 모두 이 세상에 남고, 죽은 후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전 시간에 저는 이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에서의 우리들의 질문에 대해서 불교 승려의 대답은 다만 그 질문을 인정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 질문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영혼의 형체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는 무색계(無色界)의 범천(梵天)에는 신체는 없고 오직 마음만 있다고 합니다. 영혼도 그와 같다고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 God)에 대해서 불교의 승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도덕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질투심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존경받아야 할 것을 타인에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즉 혐오심(嫌惡心)과 미워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의 주민들에게 열 개의 전염병(傳染病)을 걸리게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한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라고 불교 측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그러한 행위는 그의 전지전능함에는 아무 결점이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자기 아들의 음부 표피를 내놓은 것은 모세의 앞에 올린 것이며, 하나님의 앞에 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그’라고 하는 대명사를 사용해서 말한 것은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철로 만든 차(車)를 두려워했다는 것도 틀린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사사기 제4장 13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스라가 모든 철로 만든 차, 곧 철병거 900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군사를 하로셋에서 부터 기손강으로 모았다.’
또 출애굽기 제14장 7절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모든 병거를 그리고 또 다른 600대의 병거를 모았다.’
그러나 유다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철병거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와 같이 있던 여호와는 모든 승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골짜기에 있던 철병거를 보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떨어진 것 때문에 그가 전쟁에서 진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는 유다와 같이 있어도 이 패전이 하나님의 불명예는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아담의 콧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도, 그 생기에 의해서 하나님의 생기는 아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라고 말한 것도 틀린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귀에 한 방울의 기름을 떨어뜨려 넣은 것으로 인해서 이것을 떨어뜨려 놓은 사람의 생명의 일부분이 상대방의 몸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습니까? 콧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은 표현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그 참 뜻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생명을 부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을 죽여서 하나님께 올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신체를 재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만약 그 누군가가 그러한 재물을 올리는 짓을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그런 경우 지켜야만 하는 규칙을 만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생자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상당한 돈을 주고 풀려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서원에 의해서 이 재물을 헌납했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입다의 서원은 그가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가 만난 제일 첫 번째의 그 누구든지 번제(燔祭, bumt offering)로서 여호와에게 헌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에 따라서는 그 여자를 여호와에게 올리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입다가 서원을 실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여자를 하나님께 올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는 것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았지만, 다만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처녀의 순결에 대해서 2개월간 탄식했을 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헌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입다가 서원대로 헌납을 실천했다고 말함에 하나님에게 어떤 비난이나 불명예스런 것이 못됩니다.
또 불교 측의 친구는 ‘예수그리스도가 무덤 속에 삼일 낮 삼일 밤을 있었다.’고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 유럽의 학자 비솝 클라우톤의 도움을 얻을까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 질문에 대한 것을 극히 간결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이 문장을 우리들은 정말로 3일간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의 취급 방법에 의하면 낮3일, 밤3일이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일(日,Day)의 일부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날(日) 전체를 표현해 말하는 것은 유대인의 습관인 것입니다. 이 방법에 의해서 낮3일도 밤3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을 때, 몇 천 명의 남자 아기를 죽였다고 불교의 대표자인 그가 말했습니다만 어린애들을 죽인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탄생일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성경의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헤롯이라는 잔인무도한 자가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얼마나 잔인무도한 행위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대단히 노한 헤롯왕은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햄과 그 모든 지역 안에 있는 남자아이를 박사들에게 철저하게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시기를 표준으로 하여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도록 명하여 모두 죽게 됐습니다.’
이 같은 조치를 왜 취했는가 하면, 그 자신이 유대 왕국의 왕권을 탈위 당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왕이 저지른 죄 많은 잔인무도한 행동이 어찌 그리스도의 불명예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리스도의 명예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도 더욱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불타의 탄생일에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았다고 불교의 대표자인 그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증명할 수가 있다면 불교에 대한 그의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불타의 탄생에 의해서 한 마리의 개미보다 위대한 인물이 죽은 것을 저는 여기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불교의 경전에 의하면 불타의 어머니는 그가 탄생하고부터 일주일 후에 숨졌다고 합니다. 불타의 어머니는 한 마리의 개미보다 위대한 생명체가 아닐까요? 불교의 여러 가지 경전에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사자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타가 탄생하던 날 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범천(하늘)까지 들린 사자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듣고서 과연 몇 명이나 죽었을까요? 다른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난 것들의 원인, 다시 말해서 많은 생명체가 죽은 것은 불타의 탄생이 그 원인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외의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승려가 말하는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도 충분히 듣고서 판단하시길 여러분께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죄를 지은 것으로 인해서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인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세계에 나타나시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 헤롯왕의 잔인무도한 군대와 그가 지휘하는 모든 무리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적군이 아군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침공해 온다. 그 적군들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계속해서 외쳤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헤롯왕이 통솔하는 모든 무리들은 그리스도가 불길한 전조(前兆)를 가져오게 하는 죄 많은 적이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을 주입시켰던 것입니다. 이로서 불교의 대표자인 승려가 기독교에 반대해서 들추어낸 질문에 저는 충분히 대답했다고 봅니다.
지금부터 불교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비합리적인 종교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 신자들이시여! 당신들이 신앙하고 있는 경·율·론 삼장(經律論 三藏)이라고 하는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이 책들은 불타가 태어난 나라에서 기록한 것도 아니며, 그가 태어난 그 당시에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그 책들은 인도에서도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스리랑카라는 이 조그만 섬나라 마탈레(Matale)라는 지방의 알루위하레(Aluvihare)라는 절에서 불타가 죽고 453년이나 지난 후에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기록에서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불교도들이시여! 불타가 태어난 곳에서도 대단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리고 태어난 그 당시로부터도 상당히 세월이 지나 버린 시기에 기록된 그러한 책들의 가르침을 불타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오타마가 불타가 되기 위해서 행한 좋은 본보기의 하나로 자기의 부인과 아이들을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산타라 자아타카〉를 읽으신 분은 베산타라왕이 얼마나 비탄한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보시했는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위에 차리티라는 자기 부인까지도 보시를 했던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최저 1개월간이라도 자기 가족, 다시 말해서 부인과 자식들에게 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법률에 의해서 정부로부터 벌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만약 자기 자신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기부한다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보시(布施)로서 그녀를 올리면 대지의 모래보다도 더욱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 많다고 하며, 그가 보시한 피의 양은 큰 바다의 물보다도 더욱 많다고 하고, 그가 준 왕관을 쓴 자기의 머리는 수미산보다 더욱 높다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정도로 보시의 행위를 하기 위하여 서는 자살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것은 살인죄와 똑같은 것으로서 대단히 사악한 행동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마아바투라(Amavatura)〉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고오타마 불타가 행한 선행이라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정말로 선행(善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오타마 불타의 전지전능의 능력은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그가 일체의 지혜를 가지고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 물건들을 존재하는 물건으로 보았고, 또 생존하고 있는 것은 생존하지 않는 것 같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의 일체의 지혜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대품(Mahavagga)〉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불타가 된 후, 불타는 자신의 깨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설법을 하지 않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늘(대범천, 大梵天)에서 ‘당신의 깨달은 진리(dhamma)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불타는 생각을 달리해 자신이 깨친 진리를 설득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불타는 당시 이미 죽어 없어진 아라라카라마(Ala-rakalama)에게 설법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어는 신이 아라라카라마는 이미 죽었다고 전하자 그 후 웃다카라 마푸트라(Uddakaramaputra)에게 설법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도 역시 이미 이 세상에 생존치 않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기록을 재정리하면, 제일 처음 고오마타마 불타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대범천이 그가 깨달은 진리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충고해, 자신의 생각을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죽어 없어진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마푸트라 두 사람에게 설법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죽어 없어져 이 세상에 존재치 않음을 대범천으로부터 충고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불타는 아무런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또 다른 증명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시간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에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은 여러분들이 귀의처(歸依處, 의지처)로 하는 불·법·승(佛法僧)이라고 하는 3가지 보배, 즉 삼보( 三寶)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불타에게 귀의합니다.
두 번째로 그가 설한 법에 귀의합니다.
세 번째로는 승려들에게 귀의합니다.라고 언제나 불도들은 독송합니다.
이 중에 그 첫 번째, 불타에게 귀의한다고 합니다만 불타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불타에게 귀의해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어떠한 의지처를 법에서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교도들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뭇잎에 기록되어진 단지 하나의 보통의 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책들은 당신들 불교도들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당신들을 보호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세 번째, 당신들이 의지처로 하는 승려들에 대해서도 저는 오직 경악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승려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지만 과감히 말씀을 드릴 것 같으면, 승려들이라고 자칭하면서 악한 마음과 무지와 욕정, 그리고 욕망과 야망 등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고, 어떤 죄악도 서슴치 않고 저지를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스리랑카 승려들의 단체는 삼(Siamese)파와 버어마(Burmese)파 두 개의 종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지금 현재는 3개의 종파). 그 중 어느 한 파의 승려들은 타 종파의 승려들을 부도덕한 자들이며, 더욱이 사미 혹은 비구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 같이 비방을 받은 종파의 승려들도 똑같은 비방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리더스 키라나〉(Readers kirana)와 〈냐노 파야니〉(Nano-payani) 및 그 밖의 (당시의 스리랑카) 신문들을 읽으면 위에서 말한 것들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왜냐하면 양 종파의 사람들은 이 신문들을 이용해서 양측의 의견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어느 족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그 어느 의견도 신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측 모두 승복을 걸칠 자격이 없는 무뢰한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삼귀의(불·법·승에 귀의하는 것)라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모두 털어 버리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수호신이신 하나님께 귀의하십시오. 오직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곳에 여러분들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상 전도사 시리만나씨가 그의 발언을 마침)
☞ 6. 1873.8.28/오전 09시-10시까지-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
저의 대론자인 전도사 시리만나씨의 불교에 대한 반대 발언은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발언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발언의 첫 번째는 열병에 관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무의미한 발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관해서 대답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측에서 말한 오온에 관한 이야기가 불교도들의 논증에 의해서 지지되었다고 전혀 다른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을 제가 이미 논파한 것을 여러분들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때문에 이상 오온에 관해서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 God)"에 대한 낱말에 관한 그의 해석은 대단히 명쾌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다른 일체의 신을 신앙하는 것을 절대로 용서치 않는 하나님에 대한 전도사의 설명은 여호와가 질투심이 격심한 신이라는 것을 더욱 확증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의 다른 신을 존경하거나 다른 신에게 헌납하는 것을 그 자신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의 대론자인 전도사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타인의 행복한 생활을 보고서 그것을 질투한다면 그것은 곧 남을 증오하는 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느 누구라 해도 남의 성공을 질투함이 있다면 그 사람이 타인의 성공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질투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에 상당하는 스리랑카 말 번역인 <즈와리타 데비요:Jwalita Deviyo, 빛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해석도, 이 말이 뜻하고 있는 정의와는 전혀 다른 타당치 못한 설명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첫 번째의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두 번째의 기적도 믿지 않는다면, 세 번째의 기적을 믿어라.’라고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하는 것은, 여호와가 아무것도 자기 자신이 확실한 결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여호와가 전혀 지혜가 없음을 그들 자신들의 설명에 의해서 확실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이미 이 앞에서도 제가 말씀드렸고 기독교 측에 질문했으나, 그 답변으로서 전도사는 이집트 주민들의 전염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전염병에 대한 답변은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저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 이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모세 아들의 음부의 피부를 잘라 낸 할례제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도사께서는 성경 문맥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이해했다고 한다면 베어 낸 피부를 모세의 앞에 내놓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여호와가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 때, 여호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미리 안 십보라가 그의 아들의 음부 껍질을 잘라서 그것을 여호와의 앞에 내놓음으로써 모세를 죽기 일보직전에 구했습니다. 여호와에게 죽음을 선고받은 모세의 운명이므로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도 그를 구원할 수 없을 때,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그 당사자에게 헌납하지 않으며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에게 그 제물을 올린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자의 음부를 자르는, 즉 할례제는 여호와의 계시(啓示)이며, 모세는 그 계시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저의 대론자인 전도사께서 말하였지만, 이 답변에 의해서 여호와는 인간의 고기와 피를 좋아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관해서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철거병에 대해서 저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 또한 전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900대의 철병거 가운데 있던 군대에게 이겼다고 저의 대론자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구약성서 시사기의 제3장 3절∼15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장은 구약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인용한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문장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서 말씀드린다는 것은 저로서는 오직 놀람을 금할 길이 없을 뿐입니다. 전혀 옳지 못한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이 같이 거짓을 늘어놓아도 그렇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대론자인 전도사로서는 여호와가 철병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는 신앙이 부족했기 때문에 유다가 싸움에서 졌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여호와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충해 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유다가 신앙이 부족해서 싸움에서 졌다고 하고 여호와가 철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우리들의 대론자인 전도사가 공언한 것은 여러분들께서 모두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만약 여호와가 철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면 유다도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싸움에서 승리를 하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만약 싸움에 진 이유가 유다의 신앙 부족이었다면 일체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여호와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원조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와 같은 질문에 답변한다는 것은 감추어져 있는 그들의 결점과 모순을 표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귀에다 기름을 불어넣은 것에 대해서도 저의 대론자 전도사의 답변은 전혀 무의미했습니다. 귓속에 기름을 넣는다는 것이 생기를 넣었다는 것과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아담의 콧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생명이 아담의 몸속에 들어간 것이 됩니다. 여호와의 생명이 아담의 몸속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전도사가 들고 나온 이론도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입다의 딸의 목을 자르지 않았다고 전도사가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에게 상당의 금액을 지불하고 그녀를 구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만약 전도사가 말한 것과 같이 그녀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입다의 서원이 실천되었다고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입다의 서원은 그가 암몬 자손들에게 승리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서 나와서 자신을 영접하는 한 사람을 번제로서 여호와께 헌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서원을 실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는 실제로 자기 딸을 여호와에게 헌납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에게 번제로서 헌납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입다의 딸의 목을 잘라 번제로서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성경을 보였다)
여기에 있는 이 성경에서 입다의 딸의 목을 잘라 구워서 올리는 제물(번제)로서 여호와에게 바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우리들 주변 일부 사람들과 이러한 문제들을 논하는 것을 결코 이성적(理性的)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대론자 전도사는 또 유태인들의 일과를 오전6시부터 계산하고 있으므로, 그의 계산 방법에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3일 낮밤을 무덤 속에서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무의미한 것들을 듣는 것이 저의 본뜻이 아닙니다. 왜 제가 이와 같은 멍청한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그러므로 그와 같이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저나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이 같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본뜻이 아닙니다.
만약 이 전도사가 말하는 계산식에 의하여 해가 뜨는 것이 6시 전에 일어났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시작의 전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어떤 방식으로도 그 계산에 포함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3일간이라는 것은 3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논리적인 말들에 이 이상 상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당신들 기독교인들을 대표해 대론하는 목사와 전도사의 새빨간 거짓 주장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목사께서는 마치 제가 어린 아기들의 살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그 시기에,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해롯왕에 의해서 아무 죄 없는 어린애들이 죽임 당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이상의 지적과 같이, 이 목사는 거짓을 말해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같은 거짓 주장을 서슴치 않았을 것입니다. 필경 이 같은 사실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불명예스럽게 되는 것을 어떻게 하든 은폐시킬려고 노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결국은 숨길 수가 없어 이와 같은 거짓을 나열치 않을 수 없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더불어 그런 불명예와 이와 같은 종류들의 소문을 가지고서 불타의 명예에도 먹칠을 하려고 불타의 어머님이 불타의 탄생 7일 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타의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을 불타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녀의 수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성전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와서 모체에 임신하기 전에 다섯 종류의 조건이 있었는데, 그 첫째가 불타의 모친에 대한 장래의 수명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머니의 수명이 10개월하고 7일간 남았을 시점에서 보살(Bodhisatta)이 내려와 그녀의 태내에 잉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개월간의 임신 기간을 빼고 나면 7일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타의 탄생 7일 후에 돌아가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진실을 왜곡하고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르고 허망된 말만 하는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논쟁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전도사의 반론가운데 웃을 수도 없는 어리석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타가 태어났을 때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다수의 생명체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고 한 점입니다. 이러한 전도사의 주장은 결코 우리 불교 측에 어떠한 불명예도 주질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도사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드러낸 결과를 초래했을 뿐입니다.
불타가 태어났을 때 불타의 울음소리가 사자의 소리라고 하는 것은 불타의 위대함을 사자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라자싱하(Rajasingha)라고 하는 것은 ‘위대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코 동물들의 왕인 사자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싱하’ 혹은 ‘사자’라는 것은 ‘위대함’또는 ‘고귀(高貴, noble)’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교 경전 중 그 어느 곳에서라도 불타의 탄생에 의해서 어떤 생명체에 조금이라도 해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입증시켜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날 당시 일어난 일들, 즉 어린 아기들이 참혹히 대량으로 학살당한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것을 약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저의 대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 행위의 절대 반대자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애들의 죽음에 대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은 전도사의 변명은 대단히 저질적인 수준의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의 전조를 나타냈다고 하는 것은 범죄 행위의 반대론자가 아니고, 사악(邪惡)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려고 그 사명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탄생에서 일어나는 전조는 좋은 징조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진난만한 어린애들이 대량으로 잔혹하게 살해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전조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탄생이 결코 좋은 길조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던 중 좋고 착한 사람을 만나고 좋은 것을 접하게 되면 길조라 하고, 그와 반대로 나쁜 사람을 만나고 좋지 않은 것을 접하게 되면 흉조라 하여 마음먹었던 여행도 그만두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대론자인 전도사께서는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전도사는 참으로 뻔뻔스런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비상식적인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이 앞에서 누차 말씀드렸으므로 이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저의 대론자가 말한 불교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겠습니다.
저번 화요일(1873년 8월 26일)저의 대론자인 목사께서 연기설(緣起說)에 관해 반론하셨기에 저는 그 후에 다시 설명드릴 것을 약속했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반론하고자 합니다.
〈위숫디막가〉의 저자인 ‘붓다고사’는 연기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져 버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연기설이라는 심오한 바다에 빠져 들어간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위숫디막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이해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며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이 심오한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경·율·론 삼장의 미묘하고 심오한 의미를 충분히 빠짐없이 이해하고 있던 붓다고사까지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단히 어려운 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연기설을 가지고 무엇인가 불교에 대한 공격을 하려고 노력을 한 저의 대론자 목사의 발언은, 그야말로 밝은 달을 보고서 그 달이 떨어지기를 바라고 한없이 짖어 대는 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 대론자 목사는 연기설에 관해서는 처음의 조그마한 부분부터 끝까지 어느 부분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부모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나고 또 그 아들에 의해서 부모가 태어난다.’고 의미 불분명한 표현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에 의해 아들, 아들에 의해 부모가 태어난다.’는 말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설명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연기설(緣起說)에 관한 불타의 가르침을 인용·설명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조용히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비구들이여! 연기(緣起)라는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무지(無智, 無明, avijja)에 의해서 행(行: 형성작용)이 생기며,
이 행에 의해서 식(識: 분별작용)이 생기며,
식에 의해서 명색(名色: 이름과 형상), 즉 오온(五蘊: 사람의 몸)이 생기며,
명색에 의해서 육처(六處: 여섯 개의 느낌을 받는 몸의 부분),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가 생기며,
육처에 의해서 촉(觸: 外界와의 접촉)이 생기며,
촉에 의해서 수(受: 감수작용)가 생기며,
수에의해서 애(愛: 욕망)가 생기며,
애에 의해서 취(取: 집착)가 생기며,
취에 의해서 유(有: 존재)가 생기며,
유에 의해서 생(生: 태어나는 것)이 생기며,
생에 의해서 노사(老死)·수(愁)·비(悲)·고(苦)·번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의해서 괴로움[苦]의 한 덩어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연(緣)에 의해서 결과(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저의 대론자는 무지 또는 무명은 행, 즉 형성 작용에 의해서 식이 생긴다고 하는 오리무중한 말을 했습니다. 이 목사는 좀처럼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연기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열변만을 토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오해를 하고 있는 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우유로부터 요구르트를 만들며, 요구르트로부터 버터를, 버터로부터 버터기름(ghee)이 나오게 됨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요구르트, 버터, 버터기름은 각각 별개의 것이지만 그것이 처음 시작되어 만들어지게 된 물체는 오직 똑같은 하나의 물체인 우유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없고서는 무명도 없는 것이며, 무명이 없는 곳에서는 형성 작용도 나올 수가 없으며, 그 형성 작용이 없는 곳에는 몸과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모든 것이 상호간에 의존한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인간은 윤회 속에서 무한히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대론자는 이러한 진실의 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발취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 으로 인해서 걸맞는 집체가 생기며, 태어나는 순간으로 인한 연으로 유인(誘因)의 집체가 생기게 된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집체라는 것은 어리석은 형태, 다시 말해서 무지(ignorance)와 마음 그리고 육체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오온은 무명에 의해서 생겨나며 또한 몸과 마음에 의해서 오온이 생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예로서
‘이숙식이 생기기 때문에 아홉 개의 연(緣)이 필요하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삶을 영유하고(共生 sahajata), 서로 협조하며, 한 자리에 간이 있어도 그의 영향을 받게 되며, 또 서로 공존(共存)하게 되며, 업의 결과를 받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힘이 생기며,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이 생기고, 또한 원인이라는 것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그 원인은 자기를 떠나지 않는 등의 아홉 개의 연에 의해서 그 원인인 인(因)이 되는 것이다.’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위숫디맛가〉에서도 ‘어리석음이 없이는 형성 작용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 경전의 많은 곳에서 인식이라 함은 마음과 육체가 하나로 되어 발생함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인식(認識, vinna-na, 분별작용)이 생긴 다음에 어떻게 하여 몸과 마음이 생기는가를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야말로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반대론자인 목사는 불교교리를 전혀 전문적으로 연구하지도 않고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깊은 정글 속에서 눈먼 코끼리가 길을 잃고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목사께서는 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만 전혀 무의미한 연설들이었습니다.
그는 불타 입멸 450년 후에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의 것을 정확하게 암기 전승해 오는 것은 인간으로서 극히 불가능한 것이며, 그 당시의 승단(僧團)을 볼 때도 편집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들입니다. 이 목사의 주장이 왜 무의미하고 근거 없는 말인가를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불타가 돌아가시고(入滅, 捏槃)453년 후 왓타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aya) 왕 시대(BC 89∼77년)에 책으로 처음 편집한 것은 사실입니다. 불타의 생존 시대에도 그의 가르침을 패엽(貝葉, Golden leaves)에 이미 기록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인도에서 불타의 가르침을 책으로서 편집한 사람은 모든 번뇌와 죄업을 소멸한 성스러운 도(道)를 이룩한 아라한(阿羅漢, Araha-t)들이었습니다.
아라한들은 결코 평생 단 한 번도 죄악을 저지르거나 잘못을 행한 적이 없는 성현들의 청정한 성품을 지닌 불타 다음가는 분들로서, 무엇이든지 간단하게 기억하는 기억력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기에 그들에 의해서 편집·정리된 불교 경전들에는 추호도 과실이 있을 수 없으며 설사 글자 하나라도 오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이 기록한 불교 성전은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은 불교의 아라한과 같은 성스러운 인물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죄를 지어서 자신의 나라에 살 수 없어 도망한 모세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성경은 완전하게 한 번 불태워 소실되었다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있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멋대로 자신들의 형편에 맞게 다시 기록해 왕을 속였던 것입니다.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 〈비밧자바드(Vibajjavad)〉라는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목사께서 베산타라(Vessantara) 왕의 보시 행위를 비웃음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베산타라 왕의 훌륭한 보시행에 대한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없습니다.
불타, 즉 모든 것을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일체의 탐욕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베산타라 왕이 자기의 부인과 아들을 걸식하는 거지에게 넘겨준 것은 그야말로 마음에 일체의 걸림이 없는 보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그 거지가 원했을 때 넘겨주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애착과 탐욕을 버릴 수가 없는 영원한 번뇌 속에서의 생활이 계속되었을 것이며, 또한 깨달음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보시 행위, 즉 보시 행위를 한 그 자체도 생각지 않는 보시 행위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일체의 탐욕과 애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탐욕과 애착을 이기지 못하면 결코 영원한 깨달음의 경지, 즉 불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베산타라 왕은 푸우자카(Pujaka)라고 하는 바라문에게 자기 아들을 보시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린 아들로서는 오히려 잘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아버지와 생활한다면 일생을 산속에서만 생활했어야 할 그가 바라문에게 보시한 것으로 인해서 다시 마을에 내려가 바라문 수행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베산타라 왕의 이야기는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베산타라 왕의 부인은 어떤 남자의 부인도 되지 않았습니다. 〈베산타라 본생경〉에 의할 것 같으면 베산타라왕의 부인을 보시 받으려고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사크라(sakra,제석천)라고 하는 모든 신(神)들 중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베산타라 왕이 어느 정도의 수행을 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의 부인을 보시하라 했던 것입니다. 베산타라 왕이 조금의 애착과 탐욕도 없이 그의 부인을 보시하자 사크라는 그 자리에서 감복하여 그의 부인을 그 자리에서 다시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는 ‘보시바라밀’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서 볼 때 베산타라 왕의 보시 행위에 대한 목사님의 비판에 대해서 제가 여기서 더 이상 답하는 것은 귀중한 시간만 낭비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보다도 저는 여기서 목사 자신이, 자기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전혀라고 할 정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요 전날, 즉 8일 26일 오전 중에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며, 불교에 대해서 비판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신봉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를 비판하려 했지만 불교에는 조금도 손상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자신의 종교에 대한 비평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논설 중에 불교에서는 인간들을 소, 돼지, 말, 뱀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또한 그와 비슷한 거짓말로서 충만한 불교는 종교도 아니며 또한 신용할 수 없는 종교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들은 불교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은 불교가 아닌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의 성경 속에서 인간을 축생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우리들은 발견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여기에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구약성서 전도서 제3장 제19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인생(人生)들에게 임(臨)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一般)이라 이 모두가 동일한 호흡을 하며 이들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로다."
이와 같이 짐승들에게 인간을 비유한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까? 짐승들과 인간을 비유한 것은 불교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것만 보더라도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옳지 못한 점을 오히려 자기 자신들이 증명하는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의 대론자에게 또 하나의 다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 15장 2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기독교인들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25장 41절∼46절을 볼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배가 고플 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주지 아니하였고"
"내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영접해 주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들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굶주린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러한 너희들로서는 영구히 그 괴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며, 의롭고 올바른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시니라."
이상의 인용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올바른 행동의 사람들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기독교만을 믿는 것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기록 중에 도대체 그 어느 쪽을 신용하여 기독교를 믿어야 하겠습니까? 만약 이 두 가지 설 가운데에서 그 어느 하나가 기독교의 올바른 가르침이라 하면 다른 어느 하나는 옳지 못한 가르침이라 말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모순투성이>인 기독교의 성경은 전혀 신용할 것이 못됩니다. 거짓과 모순으로 충만한 내용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는 전혀 올바른 종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을 저는 단언하는 바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해서 이것으로 실례를 하겠습니다만, 저의 대론자의 또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자세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 7. 1973.8.28/오후 15시-16시까지-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행한 대론.
이번 대론은 오늘 저녁으로서 끝마치게 되므로 여러분들은 잘 들어주시고 잘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앞 8월 26일 오후 4시부터 5시 사이에 불교 측의 스님은 저를 '적대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님을 반대론자라고 부른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 같은 '반대론자(위룻다카라야)'라고 부른 것은 결코 굴욕적인 언사로서 사용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이 언사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인간을 짐승들에게 비유했다고 그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기독교의 성서를 인용했습니다만, 결코 그것은 입증이 될 수 없는 불필요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짐승(축생)이 모두 늙고 죽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한 예는 결코 그릇된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분들께 불교의 연기설을 해명했습니다. 이러한 연기설의 해명은 대단히 훌륭한 붓다고사도 명확한 이해를 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듯 붓다고사 선생도 해명할 수 없는 연기설의 해석을 하려고 했던 저의 친구인 스님은 붓다고사 선생보다도 위대한 자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도 난해한 연기설에 대해서 약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기설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식[識]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생기며, 몸과 마음[名色]에 의해서 감각이 생긴다. 6개의 감각[六根]79)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 이와 같이 진행되어 출생이 생기므로 생존(生存, bhava) 또는 윤회가 생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인식(認識)이라고 함은 눈·귀·코 등을 의미합니다.
또 연기설은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의 감각( yatana)이라 함은 눈·귀·코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기 곤란한 가르침이 이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연기설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나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영혼(immortal soul)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영혼은 천국에 가고 천국에 있는 것은 결코 멸하지 않는 행복한 인간들뿐인 것입니다. 더욱이 아담이 저지른 죄과에 의해서 영원한 지옥의 불 속에 떨어져 버린 모든 사람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의 친구인 스님이 그러한 사실을 마치 성경에 모순점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성경의 "삶을 얻으리라(Shall be made alive)"라는 성스런 말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불교의 무색계(無色界, ar paloka)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에 관한 가르침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 스님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기독교의 영혼설에 대해 스님이 우리들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바보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는 경·율·론 삼장이라고 불리우는 불경은 불타가 생존하던 시대에도 나뭇잎(패옆)에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만 그러한 사실을 입증할 만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불교의 경전과 많은 주석서들은 암기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불타가 죽은 450년 후에 그것을 책으로서 편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는 그의 답변은 도대체가 신용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암기해서 전승된 불교 경전이 지금 현재의 경전 중에 그 어느 부분에 기록되어 있나?를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스님은 모세를 살인자였다고 하고, 그가 그와 같은 살인 범죄자이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은 신성한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제자가 되기 그 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모세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세가 행한 범죄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마음에 걸릴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히려 불교 측에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에서 그들이 숭배하는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앙구리말라(A gulim la)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999명의 인간을 죽였습니다. 불타는 그에게 그 즉시 계를 받게 하여 출가시켜 성직자로서 허락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도를 깨친 성스러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알라바카( lavaka)라는 자가 4,300명 이상의 인간을 12년 사이에 죽여서 그들의 인육(人肉)을 먹었으면서도 그는 성현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러한 알라바카마저도 성현으로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보살행의 수행으로서 베산타라 왕으로 태어났을 때 자기 부인을 어떤 바라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대론자는 보살행 중인 왕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론자 불교 측 스님의 종교인 불교 경전 소부경전(小部經典, Khuddaka mik ya)을 볼 것 같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횟수를 당신은 나를 타인의 부인으로 넘겨주곤 하였지만 나는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하지 않고 참고 견디었습니다."
라고 석가의 부인이었던 야수다라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대론자는 불교의 전문가들에게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불교 경전에 기술되어 있는 명확한 의미를 왜곡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또 "어서 오라. 무엇이든지 걸식에 응하겠노라"라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구걸을 하러 온 모든 걸식인들에게 자신의 머리, 피, 눈, 부인, 어린애까지도 주었다고 하며, 불타는 보시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명확한 형태로 그들의 불전에서 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무엇을 논쟁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저는 불타가 되는 종자(붓단쿠라, buddhankura)의 본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쿠라(ankura)라는 것은 ‘허약한 묘목(苗木’을 의미합니다. 불타가 될 수 있다는 본성(불성)을 명기하고 있는 것을 <본생경>80)에서 약간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란타파 본생경(Parantapa J taka)>을 볼 것 같으면 주인공인 보살은 붓단쿠라(Buddhankura)라고 하는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왕(父王)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왕은 파란타파(Parantapa)라고 하는 시종과 함께 산속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산속 생활 중에 파란타파 시종은 왕비와 육체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시종은 사악한 인간으로 변질되어 왕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시종과 왕비 사이에 낳은 아들이 그의 아버지인 파란타파를 살해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인 보살 붓단쿠라의 반역적인 행위로 인해서 이와 같은 불상사, 즉 잔혹하고 부도덕한 행위가 공공연히 벌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가 성불을 하려고 하는 자들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수손디야(Susondiya)라는 본생경의 아귀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보살은 가루다(Garu a, 힌두교의 신 이름. 전설의 큰 새)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도박을 하러 왕궁으로 놀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 왕궁의 왕비와 눈이 맞아서 왕비와 함께 도망했다 합니다.
이러한 나쁜 행동 또한 불성(Buddhahood)81)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불성을 가지고 성불하기 위한 보살들의 행위라 하면 불타의 전지전능은 그만두고라도, 오늘날 어린 학생들이 상식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식도 불타에게는 없었던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불타의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일층 명확하게 말해 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증지부경전82)에 있는 <사푸타 수리요드 가마나 경전(Saptta Suriyod gamana S tra)>에 ‘8만4천 유순83)의 높이와 8만4천 유순 정도 넓이의 대수미산(Maha mera, 大須彌山)이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 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에서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날 일곱 개의 태양이 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만4천 유순의 거대한 산이 8만4천 유순의 넓이와 깊이의 바다에 의해서 덮여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 그렇게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은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그것이 발견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지구의 기구를 보이면서) 이 지구의 원주는 2만5천마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인이라면 그 누구도 모두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거대한 산이 이 조그마한 지구상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몇 주일 동안이라도 지구를 일주하면서 그 거대한 산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를 몇 번인가 일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거대한 산을 목격한 적도 또한 발견한 조그마한 증거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무지한 말을 하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자를 전지전능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타라(Matara)라는 스리랑카 남부 지방에서, 범천에 태어나기 위해서 불교의 승려 몇 명인가가 정신없이 명상에 잠겨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는 정신이상자들에게 적당한 교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의 하나인 <파라지카(P r jika)>84) 성전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생존시대에도 그의 제자들이 많은 나쁜 죄를 범했다는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나쁜 행동들이었는가에 관해서는 저의 입으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 책 중의 <맛카티 밧투(Makkati Vatthu)>라는 곳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어떤 비구가 공동묘지에 가서 아직 (새나 동물이) 쪼지 않은 시체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그 시체와 성행위[不淨法]를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柱:이 같은 내용은 목사가 지적한 부분에는 없고 다른 부분에 있음)
그리고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타의 제자 춘다(Cunda)라고 하는 수행자(柱:경전에 의하면 춘다는 수행자가 아닌 재가 신자임. 수행자 춘다는 다른 사람임.)가 공양을 올린 돼지고기(s kara maddava)를 먹고서 심한 이질(피설사병)을 일으켜 그것이 원인이 돼서 사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柱:이 설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학설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이에 대해서는 불교 측 답변시에 상술하겠다)
<대반열반경>85)에 의하면 불타는 돼지고기를 먹은 것으로 인해 심한 이질설사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가는 곳마다 수행을 멈추며 휴식을 취하고 이윽고 쿠시나라(Kusin ra)86)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신통력도, 그를 수호한다고 하는 모든 신들인 범천 등도 그의 고통을 멈추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명확합니다.
이와 같은 명확한 사실로 보아 불타에 관해서 기술된 것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기술된 넌센스의 책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우리들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우리들이 저지른 죄악을 위해서 그 괴로움을 대신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만인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린 많은 의문점을 그 어느 하나도 저의 대론자가 만족스런 대답을 하지 못한 것과,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의 모든 것을 제가 남김없이 답변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는 주목해 주시기 바라면서 저의 대론을 마칠까 합니다.
☞ 8. 1973.8.28/오후 16시-17시까지- 목사의 반론을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대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목사께서는 앞서의 대론 때 저를 '적대자(敵對者, opponent)'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가 잘못된 견해를 지적함으로 인해서 그는 저를 '친구(friend)'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즉,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치 않겠습니다.
이 앞에 화요일 오전 그의 대론에 의하면 목사님께서는 불교 경전에서는 인간을 동물과 똑같이 취급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는 그러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인간과 짐승을 비유한 것은 불교가 아니고 오히려 목사들 자신들이 신앙하는 기독교에서 그 비유를 찾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앞에서도 저는 기독교 성경에서 그와 같은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 새로 이 자리에 왕림해 주신 분들도 계시는 것 같기도 해서 다시 한 번 그 실 예를 들어 그것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구약성서 전도서 제3장 제19절에 의할 것 같으면,
"인생(人生)들에게 임(臨)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一般)이라 이 모두가 동일한 호흡을 하며 이들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로다."
이와 같은 성경의 구절은 사람을 짐승들과 비유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과 축생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목사가 주장했습니다만, 위에서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일목요연하게 증명해 준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연기설의 난해함을 손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밧투캄모 아함 앗자(Vattuk mo aha ajja)"라는 계문을 해설했습니다.
그것은 이 가르침은 대단히 섬세 미묘하다는 취지로서 인용한 것이지 결코 저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는 취지에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 자신이 붓다고사보다 더욱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목사께서는 제가 붓다고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비꼬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아마도 저의 대론자 목사님께서는 제가 그에게 파알리어의 지식이 부족함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대단한 불쾌감을 느끼고 이렇게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또 다시 연기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조리 없는 길고 긴 연설만을 나열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 목사님의 논설을 그 누구 한 사람도 이해치 못했음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연기설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는 크나큰 모순투성이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지만 연기설은 그가 주장하듯 결코 우리 인간들을 혼돈시키며 크게 모순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또 선천적인 의식과 후천적, 즉 감각의 움직임에 의한 의식의 구별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이 구별을 이해했다면 불교의 연기설은 인간들을 혼돈시키고 모순된 가르침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전에 제가 그 누구도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충분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는 연기설이라는 불교 교리가 아버지는 아들에 의하여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말할 때는 원형(円形, rotundity)의 탄생인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야말로 이러한 탄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됐다고 했을 때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버지가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여호와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聖靈, Holy Ghost)은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정리하면 여호와는 마리아의 아들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와는 마리아의 남편이 되며, 마리아는 여호와의 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어머니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그의 부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탄생 과정은 언어 도단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도 되지 않는 비유를 가지고서 불교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행동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논리는 오히려 불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설에 가장 적합하며 그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그의 반론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끝낼까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고 그 어느 종교도 철학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목사님의 생각은 새로운 표현의 사고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영혼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여행을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넌센스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이것은 그들의 미신성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의해서, 우리들의 논리는 오히려 그들의 비정당성을 밝힌 결과가 된 것을 여러분들은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명이 얼마나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애당초 기독교 측의 이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만약에 영혼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겠느냐.'는 저의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할 수 없었으므로 목사께서 자기 멋대로 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신앙하는 종교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론을 전개하겠습니까?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께서 더욱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천국에는 강력한 신들만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삶을 얻으리라(shall be made alive)'라는 말을 제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말들을 저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제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명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성경을 펴 보일 필요가 없겠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지구상의 생명체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구원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써 우리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목사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인 천국으로 가는 영혼의 형상과 모습은 아주 정교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영혼이 그렇게 정교하다면 그들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인간들의 본질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설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저의 친구 목사께서는 무색계인 범천에 태어나는 영혼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범천이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 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영혼을 범천의 본질과 비유한 것은 크나큰 모순점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오늘 오전 중에 대론한 전도사 사리만나씨의 연설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450년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책으로 엮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 앞에서의 대론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약에 더 듣고 싶으시다면 <사마야 산그라하(Samaya Sangraha)>라는 잡지의 제4절에 그 설명을 상세히 게재하고 있습니다. (柱:그는 참고 잡지를 기독교도들에게 전해 주었다)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전혀 무의미한 결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자기 나라에서 살인죄를 범하고 자기 나라로부터 도주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쭉 범죄자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세는 결코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듯 착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와 같은 범죄자가 기록한 성경을 읽고 또한 그 가르침을 믿고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짜서 기름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목사님의 주장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음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또 다른 많은 사실을 대조해 보았을 때 기독교는 결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지상 최대의 종교로 믿고 있는 기독교도들은 지금 당장 그 삿된 신앙을 버리고 올바른 종교에 귀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목사께서는 불교의 앙굴리마라87) 존자가 살인자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입니다. 앙굴리마라 존자는 결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미 한 마리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목사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불교 경전에서 입증해 보이려고 했습니다만 성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목사께서 찾고 있던 살인자 앙굴리마라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앙굴리마라라는 이름은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의 이름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존경하며 숭배하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해 깨침을 얻은 뒤의 앙굴리마라 존자인 것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죄를 지은 자는 앙굴리마라 존자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것은 앙굴리마라 존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반 재가인으로 있던 그를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란티카(Harantika, 도둑), 알라바카( avaka, 살인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베산타라 왕의 보시 행위에 대해서도 비난을 했습니다만 이 역시 오늘 아침 전도사 시리만나씨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에게 말씀드린 대답이 목사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적합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보살이 자기 부인을 타인에게 기부(보시)한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테리 아파다나(Ther Apad na, 長老尼의 비유)의 설문 중에 ‘네카 코티 사하사니 바리얏타야 다아시맘(neka ko i sahass ni bhariy tth ya d si ma )’ 등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문 속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입증할 만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바라문으로 위장하고 온 사크라(Sakra, 帝釋) 천신에게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기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바리얏타야 다아시맘(bhariy tth ya d si ma )’이란 말의 뜻은, ‘당신은 타인인 나에게 부인을 넘겨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천신은 맛디이(Madd ) 왕비를 자기 부인으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베산타라 본생경>에 의하면 베산타라 왕이 자기 부인을 사크라 천신에게 보시를 했으나 사크라 천신은 즉시 그녀를 베산타라 왕에게 돌려보냈습니다.88)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설문은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바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명확히 입증하고 싶다면 보살의 부인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부인으로 있었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대론자인 목사님께서는 그러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은 이미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상의 대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목사님께서는 ‘아가타가타난( gatahagat na )’이라고 하는 파알리어 문장을 들추어 이 문장이 불교 경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장을 우리들은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는 불교 경전이 존재한다면 그 경전을 인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께서 그 같은 경전을 명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살이 수행 중 그의 보시행으로서 눈·머리·육신과 혈액·부인과 어린애를 원하는 타인에게 주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보시행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정도의 열성과 정열이 없으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안락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도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파란타파와 수손디야 <본생경>을 인용하면서 불도를 수행하는 보살도 죄를 지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타에 대한 비난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교 혹은 불타 그 어느 쪽도 그의 언동에 의해서 명예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번뇌에 오염된 중생들이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번뇌에 오염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번뇌를 끊어 버린 불타에게 불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십바라밀89)을 완성한 보살들이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우리들은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깨달음의 경지에 든 후로는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일상 귀의하며 존경하며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이러한 불타이지 십바라밀을 수행하는 보살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께서 그러한 보살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한 구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붓단쿠라(Buddhankura)’라는 의미를 ‘허약한 묘목(苗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넌센스를 말한 것은 그의 지식이 부족한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불타가 전지전능한 자가 아니며, 어린애들의 평균적인 지식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미산이 존재한다는 의미의 ‘시네루 비카베 팝바타 라아자(Sineru bhikkave pabbatar j )’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말했습니다.
수미산이라는 산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는 지리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리학을 만든 사람은 이삭 뉴우턴(Isaac Newton, 1642-1727; 영국의 과학자이며 수학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비판해서 모리슨(R.J. Morrison)이라고 하는 천재적인 영국의 학자가 저술한 책을 저는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 의할 것 같으면 뉴우턴의 지리학은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인용하여 도움을 청한 뉴우턴의 지리학에 의하면 밤(야간)은 지구의 자전에 연유함이라 합니다. 그러나 모리슨의 저술에서는 태양이 회전하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현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국의 과학자들 자신조차도 결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리학을 가지고서 불교의 교리를 옳지 못하다고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목사님에 의해서 여러분들께 보여진 지구 모형을 여러분들은 보셨을 것입니다. 이 지구 모형은 뉴우턴의 지리학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가 반론으로 던진 공을 이제 다시 그에게 돌려보냅니다. 모리슨 역시 영국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가 회전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저술에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90) (柱:모리슨의 저술을 기독교 측에 전해 주었다.)
이 저술은 당신이 저에게 공격의 무기로 던진 공을 다시 당신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영국의 과학자 및 <태양의 법칙(S rya Siddh nta)> 등의 책을 저술한 범어학자들간의 지리학에서도 아직은 확실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지리학에 관한 이론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학으로서 인정되지 않은 지리학을 가지고 불교를 공격하려고 생각한 것은 전혀 무의미한 노력이었으며 어리석은 행동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북쪽에 수미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가 있음을 보여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나침반입니다.
이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침반을 그 어느 쪽으로 움직인다 해도 결코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북쪽에서는 자석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인가의 물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은 4대륙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석을 끌어당기는 것은 수미산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나침반의 자석 바늘 역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침반의 바늘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항상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은 북쪽에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은 수미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수미산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침반의 바늘이 왜 북쪽으로 향해 있는가를 영국의 과학자들이 납득이 될 수 있게 설명한 것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도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정의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한 과학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그 어느 분들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실 분은 단 한 사람도 안 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수미산보다 거대한 산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수미산과 같이 거대한 산, 즉 약2만5천 마일(약 4만 킬로미터)의 원주를 가진 산이 이 작은 지구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주장 또한 전혀 무의미한 노력에 불과했음을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원주는 뉴우턴의 논리에 의해서 계산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의 크기에 대해서는, 뉴우턴의 타당하지 못한 과학에 따라서 생각되어진 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른 과학자들도 그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길이의 단위인 유순(Yojana; 인도의 거리의 단위, 由旬)의 정확한 길이를 본 고장인 인도의 학자들도 알지 못하며 여러 학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길이를 목사님이신 당신께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상 수미산에 관한 목사님의 반론에 대해서 저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있으리만큼 충분히 답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미산이 존재함을 입증하기 위한 저의 증거는 가장 적절했고 논리적이었으며, 수미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목사의 반증은 전혀 비논리적이며 효과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음을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다음으로 귀신에 들려서 미친 정신이상자 승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불교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한 승려가 병에 걸린 것은 병든 그 자신의 불명예는 될지언정 불교 전체의 불명예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경전 속에서 부도덕하고 무지한 인간에게 명상법을 지도하고 그것을 실천케 하면 그 사람의 정신에 혼동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불교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목사님께서는 부처님 생존시에는 부처님을 존경하지 않고 신심이 없는 어느 한 승려가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불교를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악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단언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죄를 저지르는 승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불교 전체의 불명예로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불타가 악행을 한 승려에게 처벌을 한 것은 계율을 만들어 놓은 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계율을 만들기 전에는 그러한 승려를 처벌한 적이 없습니다.
한 예로서, 만약에 누군가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에 의해서 그에게 왕이 처벌을 내렸다고 합시다. 그러나 법률이 제정 성립되기 전에는 처벌할 수가 없는 것은 상식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타가 계율을 만들기 전에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불타는 죄를 지은 자에게 처벌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목사님의 지식은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무지(無知)의 소산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장(불교의 계율을 기록한 경전)에는 어떠한 승려가 어떠한 죄를 지어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얼마나 순수하며 명철한 종교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목사님께서 승려들의 죄를 나열·지적한다 해도 불교를 비판하는 재료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께서는 이 앞 대론에서, 계율을 기록한 율장에 의하면 어떤 승려가 어느 여인에게 임신이 중절되도록 지도한 죄로 인해서 불교 교단으로부터 파문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론자께서는 그 악행을 자행한 승려가 다만 처벌을 받은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장에서는 그의 발언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이 목사의 발언은 불교의 그 어느 부분에도 불명예를 초래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이 목사님께서는 춘다라고 하는 불교 승려가 불타에게 돼지고기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춘다라고 하는 재가 신자가 수카라맛다바(Sukara Maddava)91)라는 반찬과 함께 음식을 불타가 돌아가시기 전날에 대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드신 것으로 인해서 불타가 병에 걸리게 된 것은 아닙니다.92)
왜냐하면 그 대접을 받지 않았어도 그 이튿날은 불타께서 대열반(大涅槃)에 드시기로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만 불타의 최후의 식사로서 기록되고 있을 따름이지, 불타가 이 식사로 인해서 병환이 났다고 말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불타가 다른 음식을 드셨다고 한다면 그 음식에 의해서 돌아가셨다고 이 목사님께서는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답변을 해 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목사님께서 반론한 것에 대해서 저는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아침에 말씀하신 전도사의 반론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삼귀의93) 문제, 구족계(具足戒)에 대한 논쟁 문제,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 라마풋타라는 선인(仙人)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는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에게 귀의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불타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전혀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바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는 불타의 죽음에 관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불타의 죽음은 3단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번뇌의 죽음(Kle a Parinirv a, 煩惱般涅槃)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Skandha Parinirv a, 蘊般涅槃)이며,
세 번째 죽음은 불사리94)의 죽음(Dh tu Parinirv a, 舍利般涅槃)인 것입니다.
첫 번째 죽음은 불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우침을 성취했을 때였으며,
두 번째 죽음은 말라바(Mallava; 부처님 당시 인도의 16대국의 하나) 왕국의 사알라(S la; 娑羅)라고 하는 마을 숲 속에서 육체의 5가지 각 구성 부분(色, 受, 想, 行, 識)이 끝났을 때, 즉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며,
세 번째 죽음은 불타의 사후(死後) 5천년 뒤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불타의 사후 5천년 후에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불타의 모든 사리(유골)가 그가 깨우침을 얻었던 인도의 보리수가 있는 곳으로 저절로 집결되어 생전에 불타의 육신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천신들에게 극히 짧은 시간에 법을 설하고 불사리 그 자신이 화장되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2500년 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때까지 불사리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불타가 완전히 죽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타가 이미 죽어 없어져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전도사의 의견은 결코 올바른 의견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타가 생존시와 똑같이 선근공덕을 쌓아 부처님을 안치하고 있는 사리탑에 공양하고 불상이 모셔져 있는 곳에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며, 이 같은 실천 행위는 불교 신도로서 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을 짓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언제나 새롭게 하며 공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자에게는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늘 살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법(Dharma, 진리)에 귀의한다는 것은 불경에 귀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불타의 가르침이며, 그 법은 불타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실행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그것에 의해서 그는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승가(Sa gha, 승단)에 귀의한다 함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승가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승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리야(arya, 성스런, 성자) 승가이며, 두 번째는 삼무티(sammuti, 집단에 의한 선출·선정) 승가입니다.
아리야 승가라고 하는 것은 4가지 과(四果)95)를 증득한 수행승들을 가리키며, 삼무티 승가는 4가지 계율의 방법에 따른 구족계의 의식에 의해서 비구승의 한 사람이 된 자를 의미합니다.
승가에 귀의하는 우리들은 아리야 승가에의 귀의인 것입니다. 아리야 승가를 숭배하고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들은 무한한 선근공덕을 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승가에 귀의한다는 말에는 이상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구족계에 관해서 전도사는 <라크리비키라나(Lakrivikirana)>라고 하는 신문에 게재되어 있던 구족계에 대한 논쟁을 인용했습니다. 이 논쟁의 참가자는 샴파와 버마파의 두 명의 승려라고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에는 이 두파 어느 쪽의 승려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논쟁에 참가한 그들은 가명으로 출석한 야심에 찬 이들이었습니다. 이 논쟁에 참가한 두 명의 가명의 승려가 거기에 참가한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참 구족계에 관한 대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어떤 야심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들의 그와 같은 계획을 증명해 달라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제가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족계에 관한 논쟁은 그곳에 참가한 두 명의 승려의 문제이지 우리 불교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불교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하는 것은 전도사의 빈약한 지식을 더욱 명확히 할뿐입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도사가 반론을 제시한 아라라카라마 및 웃다카라마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밧데가마(Baddegama; 스리랑카 남부 지방의 한 마을)와 이전에 행해진 다른 지방의 대론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여겨집니다. 그 당시의 대론 내용이 담긴 출판물을 지금 여기에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 한 권을 기독교도들에게 전해 주면 그것에 관한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도 약간 남아 있기 때문에 몇 말씀 보충해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불타가 갖고 있는 천안96)의 지혜는 언제나 사물을 보는 지식이 아닙니다. 불타는 단지 그가 보길 원하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만 그의 지혜를 움직여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불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물론, 우리들 육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로서, 우리들 인간들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만 사물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눈을 가지고 있다 해도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보이질 않는다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만으로 우리들 인간들이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불타께서 성도(聖道) 후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마 풋타에게 설법하려고 했을 때는 불타 자신이 천안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어떤 천신이 그들이 죽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불타께 보고했습니다. 그때에 불타가 천안의 지혜를 발휘해서 이 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어느 세상에 다시 태어났는가까지를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생전시부터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법을 하려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 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괴로움은 불타에게는 없습니다. 언제나 일체 사물을 항상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불타는 항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항상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는 여호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필요로 할 때만 그 지혜를 발휘해서 관찰할 수 있는 불타의 지혜의 눈은 대단히 행복한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라라카라마와 웃다카라마에 관한 문제는 이상으로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기독교인 친구들이시여!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주의 깊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성도들은 천지 창조자가 그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한 증거가 기독교 성경 자신에게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1장 제2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물 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까? 왜냐하면 물 표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 것도 창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지금 말씀드린 사실을 여러분들께서 확신할 수 있도록 중요한 증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야자수 열매가 1년간 야자나무 위에서 매달려 있습니다. 이 야자수 열매 속에는 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 물에는 1년이 지나도 벌레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야자 열매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놓으면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벌레가 나고 맙니다. 구멍을 뚫지 않았을 때는 설혹 1년이 지나도 벌레가 나질 않았는데 왜 구멍을 뚫자마자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벌레가 났을까요?
만약 야자수 열매에 뚫린 구멍에 공기가 통하지 못하도록 봉해 버린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결코 벌레가 생기질 않습니다. 물이라 하는 것은 대기의 공기가 통하게 되면 반드시 그곳에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공기, 불, 그리고 물의 요소들은 상호 합성되면 그 무엇인가 미생물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물 위에 떠 있어 운행하신다.’라고 기록한 성경의 저자는 다른 의미가 아니고, 만물이 탄생하는 원인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물은 공기, 불, 물의 세 가지 요소가 존재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천지의 창조자는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의 요소, 즉 공기, 불, 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구제자도 수호신도 이상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요소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보편적으로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편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처음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논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항상 공존(共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기의 요소 속에서 불과 물이 항상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 세 가지 요소가 일체라고 말하는 것도 옳은 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의 명칭들도 기독교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인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 요소들을 그들의 하나님(God)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Brahm ), 비슈누(Vi u u), 마헤슈바라(M he var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명칭은 어찌되었건 이것들은 모두 조물주(造物主)인 것입니다. 이 외에는 조물주 혹은 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은 기독교의 신자들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금단의 나무(Forbidden Tree) 열매, 그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아담을 속여서 과일을 먹게 하는 것,97) 과일 따먹은 아담을 처벌한 것 등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신이라고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는 것, 그리고 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들이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계시지 못한 이러한 것들을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금단(對象)의 나무 열매는 아담이며,
뱀(柱:마음)은 성적인 음욕이며,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성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 열매를 먹은 이브에게 내린 처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임신과 출산이었습니다. 그녀가 받은 처벌 때문에 이브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그 괴로움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구약성서 창세기 제3장 16절)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그 나무 열매를 먹은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성경 작성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에 의해서 탄생된 것과, 아담과 이브의 성교에 의해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는 이유로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처벌로서 부과한다고 정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스리랑카에 ‘호박(pumpkin)98)도둑은 그의 어깨에 남은 자국을 보면 안다.’는 말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속담과 같이 현명한 사람들은 이브에게 가해진 처벌을 보고서 금단나무 그리고 뱀과 과일을 따먹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 여러분! 당신들께서는 인간의 생식(生殖)에 관한 성경의 우화를 이해하지 않은 채 창조신이 있다고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충분한 자료의 입증으로서 기독교인 여러분들께서는 지금까지의 환상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며,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 인간들이 고뇌와 고통 속에서 구제 받기 위해서 신앙할 필요가 있는 종교가 아님을 적어도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는 바입니다.
아직도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몇 분 남아있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불교가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인가를 몇 가지만 더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최후를 장식하는 저의 견해이므로 잘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더욱 더 자기 자신들이 고차원적이며 정신적 양식인 일상생활의 종교문제에 대해서 재고해야 하며 노력하지 않으면 진정 보람 있는 삶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은 올바른 종교에 귀의하여 그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근 공덕을 쌓고 노력하지 않는 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 진리의 종교가 어떠한 것인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예컨대 황금의 장신구를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기 전에 황금 세공인에게 그 금이 순금인가 아니면 18금인가 등의 가치를 판단해 받은 다음에 사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모르고 18금을 순금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사고 나면 반드시 손해를 볼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도 그 선택에 있어서 현인(賢人)들에게 묻고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예전의 현인들은 이 지구의 대지와 같은 무한의 지혜와 선견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수행뿐만이 아니라 세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학문, 기술, 예술 등 각 분야를 완전히 습득하여 인망과 덕망을 겸비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인들은 예전의 현인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몇 만 분의 일도 지혜와 덕망을 겸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없는 모든 지혜와 덕망은, 그들은 이미 존재치 않으나 예전의 현인들이 남겨 두었던 우수한 저서들 속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에 의해 기록된 주옥과 같은 저서를 보고서 진정한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들의 저서는 베다(Veda)99), 푸라나(Pur a)100), 의학, 천문학 등 지혜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저는 베다비야사(Vedavy sa)라고 하는 현인에 의해 저술된 <바가바타푸라나(Bh gavathapur a)라는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계문이 실려 있습니다.
"현대적인(이 문헌 서술 시대에서 본) 시대가 되면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미혹(迷惑)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불타라고 하는 성인이 쿠카타테스(Kuka e u)라는 곳에 탄생할 것이다."
현 시대를 ‘카리유가(Kaliyuga)’라 하고 그 이전의 시대를 ‘드바파라유가(Dv parayuga)’라 하며, 이 드바파라 시대에 생존했던 선인(仙人)이 이것을 저술한 것입니다. 드바파라 시대의 선인이 위에서 말씀드린 계문 속에서 현대적인 시대가 오면 현재 인도의 ‘부다 가야(Gaya Seersa)’라는 곳에 불타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가 성도하기 수천 년 이전에 벌써 선인들이 부처님 탄생을 예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가바타푸라나>는 불교 관계의 책이 아닌 선인들의 말들을 기록한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불타의 출현을 예언한 것은 불교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종교의 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선인들이 예언한 것들 중에서, 이 세상에 여호와라고 하는 창조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제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와 그리스도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을 좋아하는 자들이 기록한 것과 같이, 살해한 비둘기, 양, 염소, 가축 등의 수를 기록한 성경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패된 성경을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 누구도 신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한 서양의 학자들도 선뜻 신앙하려고 하지 않는 기독교를 왜 전통적인 불교국인 우리가 믿어야 합니까?
우리들은 이와 같은 기독교를 결코 신앙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기독교를 신앙했던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기독교를 멀리 던져 버리십시오.
그리고 의학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해와 같은 자비심으로써 고대의 선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과학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의학은 고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전해 오는 아유르베에다101)를 의미함)
유명한 의학 서적의 하나인 <바이삿자 칼파(Baisajja Kalpa)>에 불교의 위대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계문에 의하면,
"핏팔리(Pipphal , 학명: Piper Longum), 바아사(V s , 학명: Adhatoda vasica), 부루(Bullu, 학명: Myrobalam), 슌티( u h , 학명: Zingiber Offloinale), 카삼빌리야(Kasambiliya, 학명: Tragia Involucrata)102) 이 5가지 나무 열매 및 약초를 푹 달여 마시면 기침병과 열병이 치료되는 것은 마치 불교를 실천해서 윤회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전적인 의학관계로서 고문(古文)에서도 불교의 수승한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외에 자연과학에 관한 고서에서도 불교의 수승한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천문학은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고대의 성현들이 만든 천문학의 일부인 점성학(點星學)에서도 그러한 점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점성학에서는 점성도(點星圖)로써 그 별의 위치를 보고 각 개인의 전생에서의 선악의 행위 여하에 의한 결과로서 현세에 그 사람의 인생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만약 점성도에 토성(土星)이 출생좌(出生座)에 위치하고 용의 머리(rahu)가 사자좌(si ha)에 있으면, 이 사람은 전생에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도둑질을 해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며, 또 현세에서 죄를 짓고서 내세에 라우라바(Raurava)라고 하는 지옥으로 가는 운명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증거로서도 (점성학에 의해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전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교리가 틀리지 않는 올바른 종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전생이 없다고 부정하는 기독교는 참 종교가 아닌 그릇된 종교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사쿠마라차리타(Da akum racarita)라는 시를 지은 당대의 시성(詩聖) 단딘(Da in)의 저술인 <카비야다르샤(K vy dar a)>103)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말씀은 오직 진리뿐이며, 추호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행무상이라고 불타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분명한 진리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주석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멸하고 생한다는 진리는 불타의 가르침이다.’라고 불교의 참 진리성을 찬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도 수승한 종교임을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타 문헌에서도 얼마든지 증명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월등히 수승한 진정한 종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서 불교와 기독교를 이해하시는 데는 충분한 자료와 논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기독교를 버리고 진정한 진리의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고 실천수행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께서는 불교의 수미산설에 관해서, 세계를 항해하는 항해자가 수미산과 같은 거대한 산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수미산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께서 말씀하듯이 우리들 인간의 육안으로 보지 못한 것은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금단의 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자들이 ‘금단의 나무’가 생식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고 한 일은 문헌이나 새 소식에서도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수미산이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았음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저는 아트만( tman, 영혼)과 푸라마(pr a, 생명) 등의 단어를 사용했습니다만, 그것은 특별히 어려운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고 우리들 일상생활 중에서 극히 일반적으로 사용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인간으로서 올바른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의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참된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어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멀리 떠나 열반(nirv a,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이라고 하는 안락한 세계에서 생활하도록 노력 정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는 바입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이 끝나자 1만여 명의 불교, 기독교 신자들이 일제히 사두, 사두(S dhu, S dhu)104)라고 소리 높여서 제창했다.
어느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불교인들, 기독교인들 그 어느 쪽에서도 소동과 난동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평온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과 목사님이 청중들에게 정숙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군중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때 불교 신자들은 대단한 기쁨에 차서 집회에서 해산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불만이 끓어올라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기분으로 집회장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