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니원경(佛說大般泥洹經)

불설대반니원경 제3권

통융 2020. 6.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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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대반니원경 제3

 

 

동진 법현 한역

한지안 번역

 

 

 

8. 사법품(四法品)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능히 사람들을 위하여 대반니원경을 말해야 하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능히 자신을 오로지 바르게 하고, 능히 남을 바르게 하며, 능히 물음을 따라 대답해 주는 것이며, 인연을 잘 아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법이니라.

자신을 오로지 바르게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간절한 가르침을 듣고 능히 따라 싫어하고 두려워하여 몸에 털이 모두 서며 부처님 말씀대로 할지언정 어찌 불붙는 마른 나무를 안고 온몸을 데이게 하겠는가? 여래의 방편인 은밀한 가르침, 그것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항상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문득 비방을 일으켜서 마군의 가르침이라 말하며, 세상의 논리로 노래하여 무상하다 말하면서 진실이라 말하지 말라. 차라리 혀로 불붙은 마른 나무를 핥을지언정 여래의 진실이 무상한 것이라 말하지 말 것이니라. 만약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른 놀라 두려워하고 그 법을 말하는 자에게 슬픈 생각을 일으키고 깊이 여래의 법신은 영원히 존재하며 늙고 병들고 죽는 법은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해야 하느니라. 마땅히 세존은 생각이나 말로 하지 못하며 교법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내가 말한 고수경(枯樹經) 등을 잘 스스로 지닐 것이니, 이것이 보살이 능히 자신을 오로지 바르게 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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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남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세존의 설법과 같다. 어떤 한 여인이 젖으로 영아를 키우며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고념(顧念)하는 바가 있어 생각하며 한쪽에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 그녀의 생각을 아시고 곧 그녀의 아들로써 비유를 하여 법을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어머니가 아들을 잘 키울 적에 처음 손톱으로써 긁어 응고된 소락을 입에 넣어 소화하게 한 다음 점점 다시 양을 늘리느니라.’

그때 저 여인이 마음이 곧 열리어 알아차리고 문득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큰 성인께서 제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오늘 아침에 아기에게 소락을 많이 주었는데 장차 수명의 손실이 없겠습니까?’

아니니라. 이 아이는 이미 커서 밥을 먹어도 염려가 없느니라.’

여인이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했다.

기이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잘 소화되고 소화되지 않는 법을 말씀하셨듯이 교화받을 자를 위해서 먼저 무상과 괴로움과 공과 깨끗하지 못함을 말씀하시니, 만약 중생이 신심이 견고하지 못하면 문득 저 항상 머무는 법을 말씀하시는 것은 저들의 신근을 깨뜨리어 항상 소락을 소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옵니다.’

훌륭하다. 선여인아, 마땅히 그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처음 자식을 키우는 법은 조금씩 소화하기 쉬운 부드럽고 연한 음식을 주고, 나이가 이미 들어 장대해지면 단단하고 실한 것을 주어도 능히 소화하나니 걱정이 없느니라. 나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여러 제자들을 위하여 먼저 깨끗하지 못한 것과 무상과 괴로움과 공하다는 부드럽고 연한 음식을 말하여 도심이 이미 커져 대승을 받을 만해진 뒤에 이 마하연(摩訶衍)인 대반니원의 달고 쓰고 맵고 시고 짜고 싱거운 여섯 가지 맛의 단단하고 실한 음식을 말하느니라. 괴로움은 신맛이요 무상은 짠맛이며, 내가 아님은 쓴맛, 즐거움은 단맛, 나라는 것은 싱거운 맛, 항상한 법은 매운 맛이니, 번뇌의 땔나무로써 환행(幻行)의 불을 태워 대반니원의 감로법식을 익게 하느니라. 다시 선여인아, 비유하건대 자매가 인연 있는 일이 있어 집을 나와 다른 마을에 가 혹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아니할 적에 너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하나는 순진하고 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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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버릇이 나빴다 하면 집을 나가려 할 적에 진귀한 보배를 감춰 둔 곳간을 나쁜 아들에게 말하지 않고 착한 아들에게 부탁할 것이다.’

여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여인에게 물으셨다.

무슨 까닭에 보배 곳간을 나쁜 아들에겐 말하지 않는가?’

여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나쁜 아들은 하는 짓이 옳지 못하고 방일하며 먹고 쓰는 것이 법도가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며, 착한 아들은 능히 가문을 세우며 종족을 영광스럽게 드러낼 것이므로 부탁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그러하니라. 내 법도 또한 그러해서 방편으로 열반에 들고자 할 때에 여래 보장의 비밀법을 제자에게 다 부촉하면서 계를 범한 자와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는 주지 않느니라. 네가 이제 나에게 멸한다는 생각을 하느냐, 항상하다는 생각을 하느냐?’

여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에게 항상 머문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매여, 네가 말한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 관찰하고 멸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며 변하여 바꿔지지 않는 법이며 마멸되지 않는 법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어떤 중생이 여래의 처소에서 항상 머문다는 생각을 닦는 자는 마땅히 집집마다 부처님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능히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라.’

능히 묻는 대로 대답한다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여래에게 묻되 제가 마땅히 어떻게 하면 큰 시주라는 이름을 얻어 소문이 천하에 퍼지되 재물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하자, 부처님이 족성자(族姓子)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청정하고 소박함이 있어야 하나니, 동복(童僕)을 거느리지 말며, 범행을 닦아 지니고 저 노비와 처첩들에게 즐거움을 베풀고, 고기를 끊어 제거하되 기꺼이 고기를 베풀고, 술을 피하여 마시지 않되 기꺼이 술을 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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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때를 맞춰 먹되 때 아닌 때에도 베풀며, 모든 향과 꽃과 장엄구를 여의되 모두 향과 꽃과 장엄구로써 베풀어 줄 것이니라. 이렇게 하여 그 베푸는 바를 따라서 모두 자기에게 돌아오면 큰 시주가 되느니라. 만약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큰 시주라는 이름을 얻어 천하에 소문이 나나니, 일찍이 자기를 손해되게 한 털 끝만큼도 낭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아까 말한 능히 묻는 대로 답하는 것이니라.”

이때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고기를 먹지 않는 자가 고기를 보시하여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이 큰 허물이 없다면 어찌 외도의 삿된 견해를 키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땅히 고기를 먹지 말라는 법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구나. 선남자야, 잘 부처의 뜻을 알았도다. 법을 보호하는 보살의 법은 마땅히 이러하니라. 선남자야, 내가 오늘부터 제정하노니 모든 제자들에게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노라. 설사 먹다 남은 것을 얻었더라도 항상 아들의 살을 먹는다는 생각을 할 것이니, 어떻게 제자들에게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리오.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고기를 먹는 자는 큰 자비의 종자를 끊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세존께서 세 가지 깨끗한 고기 먹는 것은 허락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 고기는 사정을 따라 점차로 제정한 탓으로 그렇게 말하였느니라.”

가섭이 다시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부처님께서 아홉 가지는 받을 수 있고 열 가지 고기는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또한 점차로 제정하였으니 마땅히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을 나타낸 줄 알아야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찌하여 세존께서 생선과 고기가 아름다운 음식이라고 칭찬하셨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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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생선과 고기가 아름다운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니라. 나는 감자, 멥쌀, 사탕수수와 단 과일을 아름다운 음식이라 하였느니라. 내가 찬탄했듯이 갖가지 의복이 장엄구가 되며 또 세 가지 색 바랜 옷을 찬탄하였느니라. 생선과 고기는 탐욕을 따르는 누린내 나는 더러운 음식인 줄 꼭 알아야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세존께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제정하신다면 저 다섯 가지, 우유삼기름명주자개가죽도 또한 마땅히 받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상한 생각으로 외도 니건자(尼揵子)와 같은 소견을 만들지 말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제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오늘부터 모든 제자들에게 제정하니, 세 가지 깨끗한 고기와 피해야 하는 아홉 가지와 받는 열 가지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스스로 죽은 것도 일체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고기를 먹는 자는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우매 일체 중생들이 다 보고 두려워하며, 그 살기(殺氣)를 느끼나니, 흥거(興蕖)와 마늘을 먹고 만약 대중이 모여 있는 데에 들어가면 모두가 싫어하는 것처럼 고기를 먹은 자도 그와 같으니라. 일체 중생들이 그 살기를 느끼고 두려워 죽거나 물과 육지와 공중에 다니는 목숨이 있는 종류들이 보면 모두 달아난다. 이렇기 때문에 보살은 일찍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때에 따라 먹는 것을 나타낼지언정 실제로는 먹지 않는다. 또 선남자야, 내가 열반에 든 후 오래 지난 세상에 마땅히 어떤 비구가 비록 도를 배우나 스스로 뽐내며 말하기를 나는 수다원이다, 사다함이다, 아나함이다, 아라한이다라고 하여 악세(惡世) 가운데서 빈핍의 곤란과 고통을 여의려고 출가했으나, 갖가지 망령된 알음알이를 가진 이름만 비구인 자들이 이양(利養)을 위하는 까닭에 백의(白衣)를 공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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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이 초췌하여 고삐 풀린 자와 같으며, 몸에 가사를 입었으나 사냥하는 사람 모습 같으며, 세상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와 같으며, 병들어 파리하고 옴 오른 신체가 깨끗하지 못하면서 모니(牟尼)의 어질고 성스러운 옷을 입으나, 모습이 아귀처럼 빈궁하고 초췌해 보여 참된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의 모습을 하고 있느니라. 오는 세상에 바른 법[正法]이 부서질 때 내가 제정한 법률이 행해지는 곳에서 경전의 바른 말씀을 모두 위반하고 각각 스스로 경론과 계율을 만들어 내 계율에 고기를 먹어도 청정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송()과 논()을 지어 각각 스스로 위반하면서 모두 사문으로 석가의 제자라 말할 것이다. 또 선남자야, 내가 말한 교법에서 곡식과 쌀을 받거나 생선과 고기를 먹거나, 자기의 손으로 음식을 만들면 청정하지 아니한 것이다. 함부로 기름을 짜고 온갖 기술을 배우며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 가죽을 만드는 사람, 국왕에게 내왕하는 것, 천문과 역법을 보는 것, 의술의 처방을 내는 것, 소리를 배우는 것, 세상의 문장과 수사를 논하는 것, 노비를 두고 돈과 재물을 모으는 것, 산호자개옥돌진주보물을 모으는 것, 사자호랑이표범족제비고양이너구리를 기르는 것, 독약을 두거나 주술을 가지는 것, 그림을 그리는 사람, 서첩을 만드는 것, 무성하게 벌리는 일로 도를 좀먹게 하는 것, 노래하고 춤추며 요술로 현혹하는 힘을 겨루는 일, 이빨을 물들이고 향을 쏘여 몸에 바르는 것, 화만(花鬘)을 붙여 몸을 꾸미는 것과 나머지 갖가지 법답지 못한 종류와 법답지 못한 그릇과 의복, 나는 이러한 것들을 청정한 법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국토에 고기를 먹는 자가 많이 있으면 일체 걸식하는 것도 모두 잡된 고기일 것이니,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들이 어떻게 하면 저 가운데 마땅히 청정한 생활[淨命]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잡된 고기가 섞인 음식을 먹게 되면 마땅히 물속에 음식을 넣어 고기를 가린 후에 먹으면 계를 어기지 않으리라.”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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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음식과 고기를 나눌 수 없을 경우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항상 고기를 먹는 나라에는 모든 음식에 모두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니, 고기를 가려내고 즙을 제거해 본래 맛을 파괴한 뒤에 먹는 것은 허락하느니라. 만약 생선이나 사슴고기 등 자기 몫을 알고 먹는 자는 죄가 되느니라. 내가 오늘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 말하여 고기를 먹지 말라고 억제하였나니, 인연이 없는 자는 대반니원을 말한 것을 인연으로 또한 제정하여 마땅히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나니, 이것이 능히 묻는 대로 답하는 것이니라. 인연을 잘 아는 자는 만약 비구나 우바새가 이와 같은 뜻을 묻되 어찌하여 세존여래응공등정각께서 처음 세상에 나셨을 때에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하나 계를 제정하시지 아니하고 하나하나 이와 같은 법문을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구경에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그 뜻이 무엇입니까? 계율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하면, ‘선남자야, 들으라. 내가 바라제목차의 뜻을 분별하리라. 바라제목차라는 것은 욕구를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며 위의를 성취하고, 많이 받아 쌓지 아니하며 모든 깨끗하지 못한 집착을 여의어 일체에서 깨끗하게 하여 사는 것이니라한다. 떨어진다는 것은 네 가지 나쁜 갈래에 떨어지는 것이니, 지옥에서 불에 타고 뜨거운 물에 끓여지는 것이니라. 저 위의가 욕구가 적고 받아 쌓지 아니하여 일체에서 깨끗하게 생활[淨命]하나니라. 떨어진다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을 말하나니, 떨어진다는 것은 아비지옥 가운데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포살(布薩)이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을 키우는 것이요, 바라제목차라는 것은 삿된 말을 여의는 것이며, 비니(毘尼)라는 것은 미세한 교계(敎誡)로 위의를 조복하는 것이니라. 또 법답지 못한 물건을 받지 않으며 또한 남에게 주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이 비니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 무거운 법을 범하는 것과 열세 가지 남아 있는 법을 범하는 것이 있느니라. 30사타법(捨墮法)을 범하는 것도 있고, 91타법(墮法)을 범하는 수도 있으며, 네 가지 회과법[四悔過法]을 범하는 수도 있으며, 중학법(衆學法)을 범하고 두 가지 부정법[二不定法]을 범하고 7멸쟁법(滅諍法)을 범하기도 하며, 경전의 가르침 및 일천제(一闡提) 무리들을 비방하고 헐뜯는 것도 있다. 이러한 죄가 있음에도 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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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를 향하여 펴 드러내 허물을 뉘우치지 않고, 한결같이 덮어 감추기를 거북이 여섯 군데를 감추듯 하면 계를 범한 죄가 밤낮으로 더욱 커지나니, 어떻게 세존이 이러한 죄가 있는 것을 알고 계를 제정하지 않고 저 중생들로 하여금 악취 가운데 떨어지게 하리오. 마치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을 데리고 다른 지방에 이르고자 할 적에 그 안내책[要路]을 보여야 하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바른 길을 잘못 알아 잃어버리면 길을 잘못 들어가리니 저 꾀 많은 자가 쫓아가 불러 본래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듯이 여래의 교법도 또한 그러하니라. 처음에는 바른 도를 말하고, 만약 여러 비구들이 많은 허물을 지으면 그런 뒤에 죄를 범한 과보를 말하여 그를 위해 계율을 제정하느니라.

이와 같이 세존은 참된 진리의 길을 보이고, 중생들을 위하여 10()의 공덕을 말하나니, 하늘 가운데 하늘이고 정법의 왕이니라. 널리 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10선의 공덕을 말하고 평등하게 중생들을 관찰하기를 외아들을 보듯 하느니라. 만약 한 중생이라도 지옥 가운데 있으면 그 사람을 제도하여 지옥을 면하게 하기 위하여 지옥 가운데서 1겁을 머문다. 만약 1겁이 지나더라도 어떻게 저 계를 범한 비구로 하여금 영원히 악도에 떨어지게 하겠느냐? 비유컨대 베 짜는 사람이 베를 짜 새 옷을 만들고 나중에 떨어지면 다시 깁는 것과 같으며, 전륜성왕이 처음 10선으로써 인민을 교화하다가 중생들이 나중에 악행이 늘어나면, 다시 자재한 금륜의 신비한 보배로 가서 법률을 제정하여 그들을 조복하는 것과 같다. 세존도 그러하여 처음에는 바라제목차계를 제정하지 않다가 나중에 여러 비구들이 죄를 범하는 것이 더욱 늘어나자 그런 뒤에 계를 범한 인연이 근본이 되어 계율을 제정하게 되었느니라. 그 모든 중생들이 법을 닦기를 좋아하는 자가 저들이 일으킨 바 인연을 보고 신심이 커짐을 증명하며, 더 나아가 평등하게 4()의 매우 깊고 미묘한 뜻을 관찰하니, 전륜왕의 금륜(金輪)이 자재한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의 법륜도 또한 그러하니라. 이것이 한량없는 부처님의 교법이며 부처님의 불가사의로, 말한 교법이 불가사의이며 이 법을 듣는 자도 불가사의이며 능히 이 경을 믿는 것도 또한 불가사의이니, 이것이 인연을 잘 아는 것이며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며, 능히 사람들을 위하여 반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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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의 인연 및 대반니원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대반니원경의 인연이며 이것이 인연을 잘 아는 것이니라.

스스로 오로지 바르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정성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것을 말함이요, 오로지 이 대반니원경을 향하는 것은 마땅히 이 이름을 능히 스스로 오로지 바르게 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능히 남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모든 비구들의 뜻이 진실로 향하는 바를 알아 이 대반니원경을 말하는 것이니라. 여래가 영원히 계신다 말하는 것도 이것이 능히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인 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묻는 대로 답한다는 것은, 내가 너 가섭을 위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미묘하고 예리한 지혜와 갖가지 비밀스럽고 중요한 방편인 은밀한 가르침은 여러 성문과 연각들의 헤아리는 바가 아니니, 이른바 대반니원경이니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능히 묻는 대로 대답하는 것이니라. ‘저 중생들의 마음과 생각의 응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말함이 허망하지 않는가라고 하면, ‘비유하되 어떤 사람이 허공을 말하매 이름이 많으니 공()인가 허()인가, 있는 바가 없는 것인가, 수가 없는 것인가?’ 하라. 이와 같은 말은 모두 허망이 아니라 한다. 여래의 설법도 이와 같으니라. 대반니원경에서 말한 네 가지도 모두 응하는 바가 있으니 허망이 아니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마땅히 여래가 영원히 계신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경전과 서로 어긋납니다.”

 

비유하건대 뻘겋게 단 무쇠알을

찬 물에 던지면

뜨거운 세력이 점점 소멸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듯이

 

이와 같이 해탈하여

모든 생사의 못을 건너

편안하고 상쾌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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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 곳을 모른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너 선남자야, 이 게송을 잘못 이해하여 여래가 영원히 소멸해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무쇠알[鐵丸]은 물에 던지지 않아도 뜨거운 세력은 점점 소멸하나니, 모든 부처님여래께서 열반으로 영원히 소멸함도 또한 그러하니라. 무쇠알을 물에 던져 뜨거운 세력이 점점 소멸하듯이 여래도 그러하여 한량없는 번뇌의 묶음과 근심이 소멸하는 것이니라. 무쇠알을 물에 던지면 더운 세력은 비록 소멸하나 무쇠의 성질은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여래도 한량없는 겁수의 번뇌의 치성한 불길은 모두 소멸되었으나, 여래의 금강(金剛)과 같은 성질은 항상 있어 변하거나 바꿔지지 않는 법이며 마멸하지 않는 법이니라. 이와 같이 해탈하여 생사의 못을 건너간 자는 저 한량없는 겁의 생사 번뇌의 강을 건너는 것이니라. 여래는 이미 건너 열반에 들려 하니 모든 갈래는 영원히 멸한 곳을 알 수가 없으니 그러므로 말한다.”

 

이와 같이 해탈하여

모든 생사의 못을 건너

편안하고 상쾌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나

그 간 곳을 모른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세존께서 무쇠알을 물에 던져 뜨거운 세력이 소멸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까? 오히려 불 속에 들어간다 하겠습니다. 여래께서 열반하시나 그 실은 항상 머무십니다. 다시 중생을 위하여 한량없는 생사의 치성한 불길에 들어가 일체 중생의 번뇌와 근심을 끊어 주시니,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영원히 계신다는 것이 틀림없는 말씀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전륜성왕이 후궁 가운데 들어가 채녀들과 오락하며 잠깐 사이 동산의 누각이나 못에 나가 마음대로 즐기느라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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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영원히 없어졌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세존이 염부제를 버리고 무상을 보여 나타내는 것도 또한 그러해서 영원히 없어진다 말하지 못하느니라. 저 국왕이 깊은 궁궐을 버리고 동산의 숲에 놀러 나와 마음대로 즐기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그러해서 한량없는 번뇌의 깊은 집을 버리고 총지(摠持)의 동산에 들어가 7()의 꽃이 핀 못에 즐겁게 놀며 방편의 지혜를 타고 마음대로 나타나 변화해서 한량없는 번뇌와 근심을 소멸함이 이미 오래 되었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한량없고 수없는 겁의 생사 번뇌와 근심을 여래는 모두 마멸하여 버리고 5()의 바다를 건넜다면 무슨 까닭으로 여래가 보살이 되었을 때에 깊은 궁궐에 있으면서 채녀와 스스로 즐겨 라후라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그러므로 마땅히 번뇌와 근심을 다하여 모든 욕망의 바다를 건너지 못한 줄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여래응공등정각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대반니원이라 이름하는 까닭은 능히 큰 뜻을 세우기 때문이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듣고 사람들을 위해 말하며 의심을 내지 말라. 보살마하살로서 대반니원에 머무는 자는 능히 수미산을 좁쌀알[] 속에 넣되 수미산을 의지해 사는 모든 중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으며, 오고 가고 머물고 그침을 누가 하는 줄 모르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수미를 조알 속에 안치해 두고 그런 뒤에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는 줄 아느니라.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의 경계가 이와 같으니라. 또 선남자야,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이 삼천대천세계의 대지를 가져다 조알 속에 두어도 그 속의 중생이 피해를 입는 바가 없으며, 각각 스스로 누가 가지고 오고 가며 누가 여기에 안치해 두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이 삼천대천세계를 가져다 조알 속에 둔 후에 다시 본래대로 돌려 놓는 줄 아느니라. 또 선남자야, 이 대반열반에 머무는 보살은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가져다 자기 몸의 한 털구멍 속에 안치해도 저 중생에게 피해가 없느니라. 각각 스스로 누가 가지고 오고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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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기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이 삼천대천세계를 가져다 자신의 털구멍 속에 둔 후에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는 줄 아느니라. 또 선남자야,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이 세계에 머물면 시방의 모든 불국토를 들어 바늘 끝에 두나니, 바늘 끝으로 대추 잎을 들어 쥔 듯이 하여 다른 지방의 다른 불국토에 옮기더라도 모든 중생들이 피해를 입지 않으며, 각각 스스로 누가 가지고 오고 누가 안치해 두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르는 보살이 신통의 힘으로 한 줄을 아느니라. 또 선남자야,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은 시방국토를 가져 오른쪽 손바닥에 두기를 옹기장이의 물레같이 하여 타방의 티끌 같은 세계에 던지더라도 중생들은 피해를 입지 않으며 각각 스스로 누가 가지고 오고 가며 누가 여기에 안치했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신통력으로 하는 줄을 아느니라. 또 선남자야,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은 시방세계를 가져 한 티끌 안에 두더라도 모든 중생들이 피해를 입지 아니하며, 각각 스스로 누가 가지고 오고 가며 누가 여기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나머지 중생이 알고 보는 자가 있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의 힘으로 한 줄을 아느니라. 이와 같이 선남자야, 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마하살은 큰 신력이 있어 갖가지로 보여 나타내느니라. 이렇기 때문에 이름이 대반니원이며 이 대반니원에 머무는 보살이 하는 바를 일체 중생이 능히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네가 이제 어떻게 능히 여래가 5욕을 익혀 가까이하여 라후라의 아버지가 되었다 말하겠느냐?

또 선남자야, 내가 이 대반니원에 머물러 큰 일을 하나니, 이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일월과 백억 염부제에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되 수능엄삼매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며, 삼천대천세계의 염부제에 대반니원으로써 열반을 보이고 나타내되 필경에 열반이라는 것이 없느니라. 다시 염부제 5욕 가운데서 태로 태어남을 나타내어 부모가 나를 아들이라 하나, 나는 과거 수없는 겁부터 오면서 애욕을 영원히 다하여 더러움에 물든 몸이 없으며, 더러운 것을 먹는 몸도 없어 청정한 법신이니, 태어나는 것이 이미 끊어졌다. 방편의 지혜로써 세간을 따라 염부제에 태어나 동자가 되어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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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스스로 일컬어 말하되 내가 천상과 인간아수라에서 가장 높은 이[無上尊]’라 하니, 부모가 기뻐하며 소리를 질러 찬탄해 내가 동자를 낳았는데 땅에 떨어져 일곱 걸음을 걸었으니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라고 말하였느니라.

그때 여러 중생들이 모두 기특하다 말했으나 나는 일찍이 동자가 아니었느니라. 수없는 겁부터 지금까지 영아의 행을 여의었다. 청정한 법신이라 뼈와 살과 음식으로 자라는 몸이 아니었느니라. 법신에서 나타남을 보여 동자가 되어 세간을 따라 남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일체 위없는 복전(福田)이 되었음을 나타냈으며, 서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구경에 생사를 끊어 일체 중생에게 최후의 끝임을 나타내었으며, 동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 일체 중생을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된 것을 나타내었으며, 4()를 향하여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온갖 삿된 번뇌와 마행(魔行)을 끊고 자재천자들을 모두 항복시키고, 마땅히 응공등정각의 도를 이룬 것을 나타낸 것이며, 위로 허공에 올라가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허공처럼 능히 물들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며, 또 하방을 향하여 일곱 걸음을 걸은 것은 일체 지옥의 치성한 불길을 끄고 큰 법의 구름을 일으켜 큰 법의 비를 뿌려 중생들을 안락케 하고 큰 법의 우박을 내려 모든 악한 계율을 부순 것이었고, 염부제에 태어나 정수리에 남은 머리털을 나타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이 동자의 정수리 머리털이 함께 났으나 여러 천상이나 세상 사람이 능히 칼을 그 정수리에 대고 머리털을 깎을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였다. 수없는 겁에 이미 정수리의 머리털을 여의었으나, 정수리의 털이 있는 듯이 나타내는 것은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천신의 사당에 들어가서 큰 힘을 가진 천신과 제석과 범천과 세상을 옹호하는 신들이 머리를 조아려 받들어 공경히 귀의하며 발에 예배하는 것을 나타내었고, 수없는 겁을 천상과 인간의 높은 이가 되어 천신의 사당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염부제에서 혹 귀를 뚫는 것을 나타내었으나 진실로 누가 감히 그 귀를 뚫은 이가 있으며, 머리털을 드리워 오른쪽으로 튼 것이 사자의 털과 같이 한 것은 일체 인민이 다 동자가 사자의 털을 드리운 것처럼 보게 함이니라. 수없는 겁에 이미 머리털 드리움을 여의었으나, 오른쪽으로 틀어 사자의 털처럼 드리운 것을 나타냄도 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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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른 것이니라. 염부제에서 서당(書堂)에 들어갔으나 삼계 중에 능히 스승이 될 이가 없으며 오직 내가 마땅히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 되니,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한다. 수없는 겁에 이미 일찍이 글을 배우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 글을 배우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니라. 코끼리나 말이 끄는 보배수레를 타고 온갖 보배를 곳간에 쌓으며, 몸이 깊은 궁궐에 살면서 채녀와 스스로 즐기고 국사(國事)를 다스리되 진실로 물들어 집착함이 없으며, 이미 버리고 여의어 침을 뱉듯이 함이 오래였다. 5욕을 누리고 국사를 다스려 전륜왕이 되어 염부제에 왕노릇 함을 나타내었으나, 수없는 겁에 이미 왕위를 버렸고, 위없는 감로의 법바퀴를 굴렸느니라. 전륜왕을 나타낸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염부제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 궁중의 갖가지 욕락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워 많은 사람들이 동자의 출가를 보았으니 사람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이며, 출가를 나타낸 것도 세간을 따른 것이니라.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네 사문과와 아홉 가지 차례로 닦는 선정[九次第定]과 네 가지 참된 진리[四眞諦]를 닦는 것을 나타냄도 중생들이 다 보았고, 내가 빨리 위없는 아라한을 이룬 것은 이미 수없는 겁에서 완성된 아라한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과 처음 이룬 것임을 나타내 보이려고 나무 밑에 가 풀깔개에 앉아 뭇 마군을 항복하고 위없는 도를 이룸을 나타내었다. 수없는 겁에 뭇 마군과 모든 번뇌를 다 이미 항복시키고 감로법을 얻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과 대변소변을 나타내는 것도 청정한 법신에는 이런 것이 없건만 인간의 법을 나타내어 세간을 따른 것이다. 음식을 받는 것을 나타냄도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실은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생각이 없다. 밥 먹음을 나타냄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수없는 겁에 항상 매우 깊은 모든 바라밀을 얻었으며, 시절을 따르지 아니하고 사택에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었으나 그 실은 수면과 재치기와 하품과 찡그리고 펴는 몸의 모든 고통이 없다. 사택을 의지함을 나타냄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앉고 눕고 다니고 우러러보고 돌아보고 굽히고 펴고 쳐다보고 굽어보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도 진실로 법신에는 이러한 모양들이 없다. 목욕하고 삼기름을 몸에 바르고 버드나무 가지로 양치질하며 눈이 밝아지는 약을 붙이는 이러한 것들도 청정한 법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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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니라. 손과 발은 부드럽기가 연꽃잎과 같으며 입에서 나는 향기가 청결하여 우발라꽃과 같으며, 그 눈은 청정하여 마치 밝은 달과 같다. 이러한 법을 나타내 보임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니라. 수행으로 욕망을 없애고 거칠고 성근 밥을 빌며,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것을 나타냄도 한량없는 겁에 사문의 고행을 모두 이미 마쳤건만 인간에 처함을 나타낸 것이니라. 라후라의 아버지가 되고 정반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마야로 권속을 성취하였으나, 능히 세상의 즐거움을 싫어하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며, 숲 속의 나무 사이에 처하여 욕구의 우열과 쾌락의 차이를 나타내 왕태자로 구담의 위대한 성()을 버리고 번듯이 출가를 결행하여 중생을 제도하였다. 여래가 5욕에 물들어 집착해서 라후라의 아버지가 된 것은 아니니라. 부모가 있음을 나타낸 것도 세간을 따른 것이니, 모든 중생들이 세상 사람이라 말하나 진실은 여래는 천상도 인간도 아니니라. 다시 염부제에서 열반에 듦을 나타내나 필경에는 열반에 들지도 않느니라. 중생들이 모두 여래가 영원히 소멸한다 말하나 지금 여래의 법신은 항상 머무나니, 변하여 바뀌지 않는 법이며 마멸하지 않는 법이니라. 모든 부처님은 항상한 법이로되 열반을 보이느니라.

또 비구가 사중법 범한 것을 뭇 사람이 모두 보았으나 그 진실은 해태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며, 혹 다시 일천제(一闡提)의 행동을 나타내었거나 혹은 승가를 파괴함을 나타내어 뭇 사람이 모두 무간업 지음을 보게 하였으나 그 진실은 승가를 파괴할 마음도 없었으며, 또한 승가는 가히 파괴될 것도 없느니라. 염부제에 정법을 보호 유지하는 것을 중생들이 모두 보고 호법대사라 하나 이것도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항상한 법일 뿐이니라. 염부제에 나타나 천마(天魔)가 된 것을 중생들이 모두 보았으나 그 진실은 온갖 마군의 짓을 하지 않았으며, 염부제에 나타나 여자의 형상이 된 것을 중생들이 보고 나서 모두 찬탄해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오늘 여인이 부처가 되었구나했지만 그 진실은 여래는 여자 몸이 되지 않느니라. 저들의 하고자 함을 칭찬하는 것도 각각 인연을 따름이며, 남녀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니라. 염부제에 나타나 네 가지 축생의 갈래 가운데 태어나는 것을 중생들은 모두 진실한 축생이라 하나 그 실은 저들이 축생의 행동을 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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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축생에 들어감을 나타낸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니라. 범천 가운데 들어가 범천이 되어 스승이 되는 것을 나타내 그 모든 중생들이 범천을 섬기는 자들을 방편으로 달래 바른 법에 들어가게 하여 저들의 업을 익히지 않게 하며, 범천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며, 음사(淫舍)에 들어가 음녀의 무리를 제도하여 음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마음이 연꽃과 같아 진흙물이 더럽히지 못하며, 그 몸을 장엄하여 큰 길에 노닐며, 방편으로 마음이 물든 중생들을 달래 교화하며, 기생의 집에 들어가 여인이 되어 바른 법으로써 교화함을 나타내며, 서당에 입학하여 스승이 되어 어린이들을 교화함을 나타내며, 혹 술집이나 장기 두고 바둑 두며 노는 곳에 들어갔으나 교화하기 위한 까닭이요 저들과 같이 행동하지 아니하였으며, 무덤 사이에 가서 새나 짐승들을 제도하되 본다는 생각을 취하지 아니하며, 장자들한테 들어가 바른 법으로 가르쳐 주고 대신들 가운데 들어가 바르게 다스리기를 가르치고, 왕자들한테 들어가 교화하여 불법을 보호하게 하며, 임금들한테 들어가 교화하여 선왕(先王)의 바른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 병이 도는 겁[疾疫劫]에 나타나 약을 베풀어 모든 병자들로 하여금 몸의 고통을 여의게 한다. 바른 법으로써 인도하나니, 중생들은 이를 참질역겁이라 한다. 곡식이 귀한 겁[穀貴劫]에 나타나 배고픈 중생들에게 감로 음식을 베풀어 바른 법으로써 인도하나니, 중생들은 이를 참 곡귀겁(穀貴劫)이라 한다. 도병겁(刀兵劫)에 나타나 중생들이 각각 서로 상해하면 교화하여 화합하고 협동하게 하여 바른 법으로써 인도하나니, 중생들은 이를 참도병겁이라 한다. 겁소(劫燒:불로 인해 세계가 부서지는 괴겁)에 나타나 항상 하다고 계교하는 중생들에게 무상한 모습을 보이나니, 중생들은 이를 참 겁소라 한다. 일체 중생에게 각각 그 말을 같이하고 음성이 미묘하여 다른 유들을 이기는데 음성을 좋아하는 중생들이 이로 인해 제도된다. 네 가지 땅바람이 됨을 나타내어 낱낱이 종류를 따르면 물들어 집착하는 중생이 이를 인해 제도된다. 약나무가 되어 나타나 구하여 치료하면 중생이 이를 인해 제도된다. 사도(邪道)들한테 들어가 출가함을 나타내어 각각 저 무리들을 위하여 길잡이가 된다. 수없는 겁에 이미 외도를 여의었으나 출가를 나타내 보여 바른 법으로써 인도한다. 공교한 의방(醫方)과 주술을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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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어 일체 중생 및 외도들이 각각 교만을 품으면 짐짓 그 가운데에 갖가지 변화를 나타내어 뭇 삿된 교만과 뽐냄을 항복시키고 바른 법으로써 인도한다. 중생들이 보고 세상 사람이라 하나 여래는 항상 세간을 여읜 법에 머문다. 나아가 하천한 종이나 일꾼이 됨을 나타내어 유를 따라서 사람을 제도한다.

염부제에 갖가지 다른 업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없으나 그 진실은 여래는 더불어 같이 일하지 않는다. 그러한 형상이 됨을 나타내는 것은 세간을 따르는 것이다. 북울단월서구야니동불우체의 스물다섯 곳 내지 삼천대천세계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도 세간을 따르는 것이다.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여래는 큰 방편의 지혜를 성취하여 모든 하는 바에 변화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렇기 때문에 이름을 대반니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공덕에 머물면 모두 능히 유를 따라 갖가지 변화가 자재하여 두려움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라후라의 아버지라 의심하지 말라. 여래는 수없는 겁에 이미 생사애욕의 큰 바다를 여의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며 변하여 바뀌지 않는 법이며 마멸하지 않는 법이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 여래가 항상 머무는 법이고 마멸하지 않는 법이며, 변하여 바뀌지 않는 법이라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니원(泥洹:열반)을 찬탄하시되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아 그 이르는 곳을 능히 알지 못한다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비유로 나타낸 것은 그런 말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그릇에 소유(酥油)를 담아 등을 켜면 소유가 이미 다하면 등불이 꺼지지만 그 그릇은 남아 있다. 여래도 그러해서 소유와 같은 번뇌의 치성한 등불이 모두 꺼졌지만 여래 등의 그릇은 항상 남아 없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약 마땅히 소유와 그릇이 함께 다한다면 여래 니원도 또한 마땅히 함께 다하리라. 등이 꺼져도 그릇이 남으니, 그러므로 여래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생기지도 않는 니원의 쾌락이니라. 또 선남자야, 내가 등불이 꺼진다고 말한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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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한에 비유한 것이고 니원을 말한 것이 아니니라. 아라한이라는 것은 증상과(增上果)를 얻은 것이니, 세간의 더러운 음식, 탐욕이 모두 소멸하고 욕식(欲食)이 다한 것이 등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라. 아나함이라는 것도 그 뜻이 또한 그러하니라. 그래서 내가 방편으로 미묘하고 은밀한 가르침을 말한 것이지 니원을 말한 것이 아니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나함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돌아와 몸을 받지 않는 것이 아나함이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또한 숨은 비밀 같은 법이 있는 것이 환술사와 같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내가 말한 법은 비유컨대 가을달이 찼을 때와 같아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고 모든 장애와 가림이 없고 또한 숨기는 비밀도 없느니라. 또 장자가 돈과 재물이 막대한데 오직 외아들이 있어 애정으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데리고 스승의 문하에 가 반 글자를 배우게 하였으나 시절이 오래지 않아 빨리 배우지 못할까 염려되어 아버지가 스스로 쫓아가 데려와 밤낮으로 은근히 반 글자만 가르쳤나니 어떠하냐? 선남자야, 그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쳐 반 글자만 배우게 했을 때 어찌 능히 모두 일체 기론(記論)을 알겠는가? 모르겠느냐? 만약 능히 일체 기론을 모두 알 수 있다면 그 아버지가 어찌하여 반 글자만 가르치리오? 어찌 사랑하는 아들에게 숨겨두고 기론을 가르치지 아니하겠는가?”

가섭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아들이 어려서 능히 기론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르치지 아니한 것입니다. 만약 마땅히 몰래 아껴서 그랬다면 숨겨 감춘 것이지만 마음을 털어 권하고 격려해 힘을 따라 점점 가르쳤으므로 숨겨 감췄다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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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옳도다. 선남자야, 네가 말한 바와 같이 화를 내고 아까워서 숨기고 아꼈다면 숨겨 감춘 것이라 하겠지만 나는 일체 중생을 자비심으로 사랑하여 외아들과 같이 생각하므로 그가 어려서 심오한 법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니라. 그가 아들을 가르치매 처음 반 글자를 배우게 하는 것처럼, 나도 또한 그와 같이 해서 9부의 경과 열 가지 지혜력과 네 가지 진제법과 8성도분을 말하고 매우 심오한 기론인 방등과 대승은 말하지 않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비유컨대 장자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가르칠 적에 먼저 반 글자를 배우게 하고 반 글자를 이미 알면 다음에 차례로 매우 심오한 기론을 가르쳐 아들로 하여금 성취되게 하듯이 나도 또한 그러해서 다만 제자들을 위하여 9부의 경을 말하고 그가 감당할 만한 것을 안 후에 대승의 기론을 말하느니라. 여래는 영원히 남아 변하여 바뀌지 않는 법이라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열어 넓히게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비유컨대 여름에 구름과 뇌성과 번개가 일어날 때에 반드시 큰 비가 내리나니, 온갖 곡식과 초목이 모두 윤택해지느니라. 여래도 오늘 또한 그러하니 큰 니원의 미묘하고 비밀스런 법의 구름을 일으켜 큰 법음을 떨치면 반드시 감로법우(甘露法雨)가 내려 중생을 안락하게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의 말씀과 같이 감춰 쌓아둔 바가 없다는 것은 단식(摶食:형체 있는 음식)임을 알겠습니다. 새가 공중을 나는 것과 같아 발자취를 찾기 어려우니 여기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쌓는다는 것은 모아 쌓는다는 뜻이며 받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요, 감춘다는 것은 창고에 저장한다는 뜻이며 받아들여 쌓아 둔다 해서 감춰 쌓는다 하느니라. 감춰 쌓음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함이 있는 감춰 쌓음[有爲藏積]과 함이 없는 감춰 쌓음[無爲藏積]이니라. 함이 있는 감춰 쌓음은 성문을 말하고, 함이 없는 감춰 쌓음은 여래를 말한 것이니라. 스님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동등한 스님과 동등함이 없는 스님이니라. 동등한 스님은 성문승이고 성문승은 감춰 쌓음이 없으니 이제 어떻게 종과 돈, 재물을 창고에 받아 쌓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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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 삼기름이나 소금 등도 오히려 감춰 쌓지 아니하느니라. 여래가 어찌 종 등을 거느림을 허락하겠는가? 누가 여래가 허락했다고 말한다면 세세에 마땅히 혀를 뽑는 지옥에 떨어지리라. 성문의 동등한 스님은 감춰 쌓는 것이 없다. 능히 단식을 알아 단식을 탐해 맛보려는 생각을 품지 않느니라. 이러한 등은 이런 곳에 발자취를 찾기 어렵듯이 속히 위없는 등정각을 이루나니, 발자취를 찾기 어려운 까닭에 여래라 이름하느니라. 함이 있는 스님들도 오히려 감춰 쌓음이 없거늘 하물며 함이 없는 스님이랴. 함이 없는 스님이란 모든 부처님여래이니, 모든 부처님여래가 어찌 비밀로 숨김이 있겠는가? 만약 비밀로 숨김이 있다면 이는 감춰 쌓음이니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쾌락의 니원을 말하는 것이다.

저 허공의 해구름바람번뇌의 온갖 모습이 없으면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으며 상쾌하고 즐거워 움직이지 않나니, 그러므로 니원이라 이름하느니라. 니원을 얻었기 때문에 여래 대반니원이라 이름하느니라. 크다는 것은 큰일을 판단하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크다는 것은 함이 있는 수의 이름이니라. 만약 어떤 한 사람의 수명이 한량이 없다면 대인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람이 능히 법을 행하여 사람 가운데 큰 사람이 되고, 만약 다시 여덟 가지 큰 사람의 생각을 성취하면 이를 대인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크다는 것은 함이 있는 수의 이름이며, 니원이라는 것은 모든 부스럼과 혹을 여의었기 때문에 니원이라 이름하느니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아 큰 고통을 만났을 때 훌륭한 의원을 만나 부스럼의 고통을 치료하여 모두 제거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 선남자가 부스럼과 혹을 여의고 다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널리 중생들을 위하여 부스럼병을 치료해 주듯이 여래응공등정각도 또한 그러해서 염부제 가운데 일체 중생의 한량없는 겁의 음욕성냄어리석음 등 번뇌의 독에 의한 통증을 대승의 감로법약을 말하여 부스럼병을 치료하느니라. 이 중생들에게 부스럼병을 여의게 해 놓고 다시 다른 나라에 나타나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온갖 병을 치료하느니라. 이렇기 때문에 이름을 대반니원이라 하느니라. 진실한 뜻과 및 방편의 뜻을 모두 다 대반니원이라 하느니라. 여러 취() 및 해탈에 들어감을 나타내며, 저들의 교화 받을 만함을 따라서 곳곳에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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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 이것이 중요한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름을 대반니원이라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떠하나이까? 세존이시여, 훌륭한 의원의 법으로 능히 일체 부스럼병을 치료하여 낫고 나면 다시 다른 처방을 나타내어 다른 병들을 치료하나이까?”

그러하느니라. 선남자야, 능히 일체를 치료하여 모두로 하여금 병을 여의게 하느니라. 오직 병이 깊어 치료할 수 없는 자는 제외하나니, 모든 부처님세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천제(一闡提)를 제외한 나머지 온갖 병을 다 치료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다시 물었다.

해탈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 해탈이란 색이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느니라. 색이 없다는 것은 성문과 연각의 해탈이요, 색은 여래의 해탈이니라. 해탈이 비록 색이나 색이라고 말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비상비비상행천(非想非非想行天)은 색이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므로 또한 색이 있지 않다 하느니라.”

비상비비상천이 색이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한데 또한 색이 아니라면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즐깁니까? 이 일을 마땅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라 모든 성문이나 연각들의 알 바가 아니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오직 원하옵나니 세존이시여, 거듭 여래의 대반니원과 해탈의 뜻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 해탈이라는 것은 일체 속박의 화합을 모두 여읜 것이다. 화합을 여의었다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 태어남이다. 부모를 인하여 그 아들이 태어남을 이를 태어남이라 하며, 그 해탈이라는 것은 곧 이렇지 아니하니라. 마치 제호(醍醐)의 본성이 청정하듯이 부모의 애욕을 인하지 아니하고 커서 중생을 제도하므로 태어남이 있음을 보여 나타내느니라. 그러므로 해탈을 태어나지 않는 태어남이라 하느니라.

또 그 태어난다는 것은 비유하면 곡식이 종자에서 싹이 나는 것과 같지만

 

[91 / 210]

해탈은 그렇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해탈을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해탈한 자는 여래니, 때문에 여래는 태어나지 않는 태어남이며, 짓거나 만드는 바가 아니니라. 진실로 만든다는 것은 성곽이나 누각을 어떤 사람이 짓는 것과 같고 해탈은 이렇지 않나니, 때문에 해탈은 짓는 자가 없다 하느니라. 해탈한 자가 바로 여래이므로 마땅히 여래는 만드는 것이 아닌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를 함이 없다 하나니, 그 함이 있는 것은 비유컨대 옹기장이가 찰흙으로 그릇을 만듦에 지음이 있고 부숨이 있는 것과 같지만 해탈은 이렇지 않느니라. 지음도 없고 부숨도 없기 때문에 해탈은 지음도 없고 부숨도 없는 것이라 하느니라. 해탈한 자가 여래니 마땅히 여래는 태어나지 아니하며 죽지도 않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렇기 때문에 여래를 함이 없는 법이라 하나니, 여래가 대니원에 들어가도 쇠하여 늙는 모습과 형체가 마르며 몸이 수척하고 머리털이 희어지고 이빨이 빠지는 일의 노상(老相)이 없느니라. 그 실제 해탈은 이렇지 아니하니 영원히 일체 늙고 헐고 변해지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느니라. 해탈한 자는 여래이니, 때문에 여래는 쇠하여 늙는 모습이 없으며 따라서 병도 없나니, 그 병이라 이름함은 사백사병이 있으며, 그 나머지 질병의 수는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 모든 병환을 여의었기 때문에 해탈이라 이름하며 해탈한 자는 곧 여래니라. 법신은 청정하여 병이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는 병이 없다고 말하느니라. 병이 없기 때문에 죽음도 없나니 중생은 항상 죽어 해탈이 없기 때문에 다함이 있고 죽음이 있느니라. 영원히 죽음을 여읜 것을 해탈이라 말하니, 그 해탈한 자는 곧 여래며 여래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최고의 미묘한 공덕을 성취하였기에 죽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금강과 같은 법신은 청정하여 부서지지 않나니, 어찌 덧없이 변하여 부서지는 모습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죽지 않으며 모든 때의 더러움을 여의었느니라. 비유하건대 깨끗하고 좋은 흰 천에 소유(蘇油)가 얼룩진 것과 같으나 실제 해탈은 이렇지 않고, 흰 연꽃이 청정하여 때가 없는 것과 같으며, 여래의 해탈도 그러하느니라. 영원히 애욕과 모든 티끌의 더러운 때를 여의었으니, 때문에 여래를 이름하여 때 없는 이[無垢]라 하느니라. 모든 제한된 장애를 여의었으니 만약 임금이 제재함이 있으면 제한된 장애라 하니, 그 실제 해탈에는 아무런 제한된 장애가 없느니라.

 

 

[92 / 210]

탈한 자는 곧 여래니, 그러므로 여래는 장애가 없이 청량하느니라. 청량한 곳이란 세속에서는 천신을 모신 묘당을 청량하다 하나 이는 거짓된 말이라 오직 해탈한 자만이 진실로 청량하나니라. 그 해탈한 자가 곧 여래이니 그러므로 여래를 청량하고 안온하다 하느니라. 안온이라는 것은 비유하면 도로에 모든 도적이 없는 것을 일러 안온이라 하나 참된 해탈자는 곧 이렇지 아니하다. 그 성품이 두려움이 없는 것을 일러 안온하다 하느니라. 해탈한 자는 곧 여래이므로 여래를 안온하여 두려움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여의었으니 그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것은 비유하면 국왕이 항상 원적(怨敵)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영원히 이러한 두려움이 없나니, 비유하면 전륜성왕이 아무런 공포와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 자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니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여래 법왕이 위없는 바퀴를 굴려 모든 원적을 없애나니 이렇기 때문에 여래를 두려움 없고 근심이 없다 하느니라. 근심과 두려움이란 것은 비유컨대 국왕이 반역을 도모하는 자가 있어도 능히 항복시키지 못하고 항상 근심과 두려움을 품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이러한 근심과 두려움이 없나니, 비유컨대 국왕이 원수를 항복시켜 근심 없이 상쾌하고 즐거운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니 여래는 근심이 없고 모든 티끌의 더러움을 여의었다. 그 티끌의 더러움이란 것은 비유하면 봄바람이 티끌 먼지를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모든 티끌 먼지를 여의나니 전륜왕의 상투 속에 밝은 구슬이 티끌과 때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 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티끌의 더러움을 여의고 모든 허위를 여의었다. 그 허위라는 것은 비유하면 굽지 않은 병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곧 이렇지 아니하니 마치 금강이 허위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허위가 없으며 자재하지 못함을 여의나니, 자재하지 못하다는 것은 빈궁한 사람이 남의 재물을 짊어졌지만 재물의 주인이 가지는 것을 제한하여 자재하지 못함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하니 그 해탈자가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자재하여 모든 환난의 침해가 없다. 모든 환난의 침해라는 것은 사람이 봄에 더위를 겪고 여름에 술을 마시며 겨울에 추위를 겪으면 그 몸을 상하여 스스로 환난의 침해를 생기게 한다. 참된 해

 

 

[93 / 210]

탈자는 이렇지 아니해서 모든 환난의 침해가 없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환난의 침해가 없으며 모든 흐림을 여의느니라. 비유하면 허공이 모든 흐림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흐림이 없나니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흐림이 없으며 얽매임이 없느니라. 얽매인다는 것은 벗과 권속들이니 참된 해탈자는 이러한 얽매임이 없느니라. 전륜왕은 독선적이어서 벗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독특하게 착하고 기이하느니라. 수련화가 기이한 것이 아니며 불에 연꽃이 자라면 기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또한 이러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희유하고 기특하여 능히 함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영아가 이가 나지 않으매 능히 나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이와 같아서 때 아닌 때에 얻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느니라. 일천제는 게으르니 게으름으로써 시체처럼 누워 종일 떠들며 마땅히 성불한다 하나 성불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느니라. 가령 법을 믿는 여러 우바새들이 해탈을 구하여 피안에 건너고자 하는 자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시체처럼 누워 있음이랴. 까닭이 무엇인가? 저들이 이룰 성질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해탈에는 능히 함이 없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능히 함이 없으며 한량이 없고 수가 없다. 비유하면 큰 바다를 오히려 헤아려 알 수가 있다 해도 참된 해탈자는 한량이 없고 수가 없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한량이 없고 가장 수승하느니라. 가장 수승하다는 것은 능히 비교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큰 바다가 비교될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가 가장 수승하고 높게 드러난다. 높게 드러난다는 것은 비유컨대 허공을 능가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여래는 높게 드러나 뭇 성인 가운데 왕이다. 비유컨대 사자가 모든 짐승의 왕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모든 법의 왕이라 해탈 광명이 일체법을 비추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가장 위가 되니, 비유컨대 제방(諸方)에서 울단월(鬱單越)을 위라 하는 것과 같으니라. 해탈이 가장 위인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가 가장 위이며 위가 없느니라.

 

 

[94 / 210]

비유컨대 제방에서 울단월이 최고여서 위가 없다 하는 것과 같으니라. 해탈의 위없음도 또한 이와 같다.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가 위없고 항상한 법이니라. 모든 천상의 사람들이 죽음을 항상한 법이라 하지만 해탈의 항상한 법은 그렇지 아니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러 견고하느니라. 파초와 거품은 견고함이 없나니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폐루(弊漏)를 여의느니라. 무릇 썩은 담장은 모기가 의지하는 곳이다. 그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새로 단장한 담장에는 능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해탈도 이와 같아서 일체 악법이 능히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가장자리가 없나니 취락과 국토에는 가장자리가 있지만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하나니, 비유컨대 허공이 가장자리가 없는 것처럼 상쾌하고 즐거우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미묘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나니 새가 공중을 날매 발자취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해탈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와 같다.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매우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라. 부모가 낳아 길러 주신 은덕이 매우 깊어 능히 헤아릴 수 없듯이 참된 해탈자도 또한 그러하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매우 깊어 보기 어렵나니 모든 중생들이 각각 자기의 몸에 여래 성품이 있어 미묘하고 은밀하여 보기 어려움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미묘하고 은밀하여 보기 어려운 것도 또한 그러하나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능히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정수리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해탈도 이와 같아서 모든 성문이나 연각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굴택(窟宅)이 없으니 굴택이란 사는 집을 일컫는 것이다.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비유컨대 허공과 같아 25처의 생사가 있는 곳을 영원히 얻지 않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취하는 바가 없다. 취하는 것이란 손으로 아마륵 열매를 잡는 것과 같으니 참된 해탈자는 곧 이렇지 아니하느니라. 마치 환술쟁이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능히 취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잡예(雜穢)를 여의나니 잡예란 잡색의 옴문둥병소가죽으로 의복을 만든 것 같은 것들로서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해서 마치 때맞춰 짜는 우유가 한 색깔, 한 맛인 것과

 

 

[95 / 210]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의 미묘한 한 모양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청정하니 진흙의 흐린 물을 청정하지 못하다 하는 것이다.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해서 공중의 비가 한 맛으로 청정한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참되고 미묘하나니 마치 보름달이 구름의 가림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해탈도 이와 같아서 때가 없고 참되고 미묘하나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참되고 미묘하고 고요하나니 머리의 불을 끄는 것같이 하면 고요하지 못하니라. 그 해탈자는 영원히 치연한 번뇌의 재환(災患)을 소멸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평등하나니 평등하지 못한 것은 두 미친 사람이 그 성질이 똑같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해서 그 성품이 평등하여 마치 어머니와 아들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적멸하여 최상의 곳을 얻어 더 이상 구하려는 생각이 없느니라. 마치 배고픈 사람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음식을 얻어 배불리 먹고 만족하여 더 이상 구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이미 끊어졌나니 비유컨대 낚싯밥과 줄이 이미 끊어진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이와 같으니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저 언덕에 건너가니 비유컨대 강물이 흘러가매 이쪽저쪽 언덕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한량없는 생사는 이 언덕이요, 참된 해탈은 저 언덕이 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못에 고인 물이 청정한 것과 같나니 못에 고인 물은 강물과 달라 마치 큰 바다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맛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니라. 만약 종자를 집에 두면 그 맛이 바뀌어 쓰게 되느니라.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으니,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방일을 여의나니, 방일이란 것은 5()을 탐하여 즐기는 것이나 참된 해탈자는 그렇지 않느니라. 그 성품이 청정하여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갈애를 조복하느니라. 사랑에 두 가지가 있으니, 생각으로 사랑하는 것과 법으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중생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니라. 참된 해탈자는 염애(念愛)가 없어 나와 내 것을 여의었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다 멸하여 일체 생사습기(習氣)구쇄(鉤鎖)가 모두 소멸하였으니, 이 이

 

 

[96 / 210]

름이 해탈이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세간의 집이 되며 일체 함이 있음을 건너 덮어 주는 그늘이 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세간의 의지가 되느니라. 국왕이 여러 나라의 읍()을 유행하는 것처럼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고 쾌락에 움직이지 않나니, 이름이 해탈이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곳은 항상 편안하니라. 광야는 험난하고 공포스러우나 참된 해탈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사자가 모든 짐승 가운데서 왕이 되어 아무런 공포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 자는 곧 여래다. 모든 핍박을 여의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악한 짐승에게 쫓기는 바가 되어 아무 구원해 주는 이 없이 액난을 면하려는 것과 같으나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하니, 뱃사공이 배를 잘 수리하면 능히 큰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찌꺼기나 더러움이 없나니, 우유에서 소락이 나오고 소락에서 생소(生蘇)가 나오며, 생소에서 숙소(熟蘇)가 나오며, 숙소에서 제호가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오직 제호 자체의 성품이 청정하여 모든 찌꺼기나 더러움을 여의나니 해탈도 그러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뽐내고 자만하는 것을 조복하나니, 마치 국왕이 뽐내고 자만하여 스스로 크게 하여 아무도 동등할 자가 없으나 그 해탈자는 이렇지 아니해서 모든 뽐내는 자만을 여의어 나와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무명을 소멸해 제거하나니, 비유컨대 우유와 소락이 바뀌어 서로 다른 것을 내어 제호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라. 그 제호는 모든 찌꺼기나 더러움을 여의어 자체의 성질이 밝고 깨끗하니, 해탈도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욕망을 여의어 한가롭고 고요하며 짝이 되는 두 가지 법 등이 없느니라. 홀로 가고 홀로 걷는 것이 빈 들판의 코끼리와 같으니라. 해탈도 이와 같으니,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속임을 여의어 내 것이라는 데서 해탈하여 여래장에 드느니라.

모든 천상 사람과 아수라의 몸도 견실함이 없나니, 마치 이란(伊蘭)과 갈대와 파초처럼 견실하지 못하여 여래장을 여의었으나, 참된 해탈자는 여래장에 들어가 모든 허위를 여의고, 일체 있음을 끊나니 해탈도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부처의 바른 법에 들어가나니 바른 법이 아닌 것은 백엽화(百葉華)와 같다.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97 / 210]

여래다. 한 성품에 들어가나니 갖가지 성품은 일체 중생의 성품이며, 갖가지 목숨은 일체 중생의 목숨이다.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한곳에 들어가나니 모든 들어가는 문에 내 것이라는 것이 없나니 해탈이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선법이 되나니, 비유컨대 효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해탈도 그러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세간을 벗어나서 일체법을 넘어 그 위를 지나나니, 일체 맛 가운데 참해탈의 맛이 제일이 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담연하여 움직이지 않나니, 움직인다 하는 것은 바다에 파도가 솟는 것과 같다. 참해탈자는 그렇지 않나니 인다라(因陀羅)의 깃대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도 동요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법당에 오르나니 세간의 집은 왕의 궁전과 같으니 참된 해탈의 집은 이렇지 않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광명이 비치어 빛나는 것이 진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나니 해탈도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쉬어 상쾌하고 즐겁나니 마치 국왕이 적국을 새로 항복시켜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즐거운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도 모든 5음의 고통을 여의어 니원의 쾌락뿐이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남김없이 필경에 모든 생사에 매여 묶인 단단한 감옥을 여읜다. 비유컨대 죄수가 죄를 마치고 감옥을 나오는 것과 같다. 해탈도 이와 같으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번뇌의 독을 여의고 한량없는 번뇌의 독사와 근심을 다 이미 해탈하여 일체 유()를 쉬고, 일체 고통을 여의어 일체 즐거움을 얻어 영원히 해탈에 쉬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고 일체 번뇌를 영원히 이미 다 제거하고 3()의 뿌리를 뽑아 남김없이 해탈하였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일체 유()를 여의고 일체 유를 영원히 멸하고 니원에 들어 구경에 해탈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모든 음()을 초월하고 일체 악법을 초월하여 영원히 해탈에 처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자재를 여의고 모든 내 것을 여의나니 세속은 내가 아니라 진실로 내가 없어야 불성이 나타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그 성품이 허공이니 허공이라는 것은 있고 없음을 모두 얻지 못한다. 니건(외도의 한 파) 등이 있어도 있는 바가 없다는 것과 같으니라. 참된 해탈자는 이렇지 않느니라. 또 공하다는 것은 소밀(蘇蜜)병에 소밀이 없으므로

 

 

[98 / 210]

빈 병이라 하는 것과 같다. 그 진실은 공하지 않나니 물건이 없는 탓이다. 형색이 아직 있으므로 마땅히 공하지 않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해탈이 공하지 않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형색이 있으므로 공하지 않다 말하느니라. 한량없는 번뇌와 25유의 나고 죽는 윤회의 세계에서 가는 처소의 가고 옴이 영원히 끊어져 소밀이 들어 있지 않는 병을 빈 병이라 하는 것처럼 모든 허물과 근심을 소멸하였으므로 공이라 이름하느니라. 병의 색상(色像)과 같이 세간법의 두루 돌아 행하는 곳을 여의어 쾌락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저 병색은 항상함이 없는 법이니라. 참된 해탈자는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공하지 아니한 공이라 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처소에 집착하는 바를 여의나니, 처소에 집착하는 바라는 것은 제석이나 힘센 범왕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깨달음의 지혜를 이루어 이 모든 애착에서 다 모두 해탈하여야 하느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탐하는 것이 없이 일체 구하는 것을 다 소멸하였으며, 탐욕이 영원히 다하여 모든 습관의 집착을 벗어난 것을 소멸이라 이름하느니라. 그 소멸해 다한 것이 곧 해탈이니라. 그 해탈자는 곧 여래다. 니원의 쾌락이니, 그 니원이라는 것은 비유컨대 뭇 사슴이 사냥꾼을 만나 위태하고 두려워 죽게 되었을 적에 산과 들로 도망해 달아나다가 선인의 굴을 만나 문득 살아나 안온하고 쾌락한 것과 같으니라. 살아나 쾌락한 것의 이름이 니원이니 니원은 다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일체 한량없는 생사와 뒤바뀐 번뇌의 원수 집을 벗어나 방편으로 도피하여 바른 법을 지닌 선인의 굴택에 들어가는 것이 모니(牟尼)의 쉬는 곳이니라. 다음에 삼보에 귀의하고 살아나 쾌락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을 살려 쾌락하게 하는 것의 이름이 니원이니, 다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모든 중생들이 삼귀의를 얻으면 이름이 니원이니, 어찌 하물며 여래의 일체종지로 영원히 이 몸을 버림도 니원의 안온 쾌락이 아니겠는가? 니원에 들어간 자는 사람이 미혹하여 취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묻되 편안하고 즐거운가 하면, 그가 취한 데서 풀려나 대답하되 편안하고 즐겁다 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중생들이 수없는 겁에 생사 25유의 미혹해 취하였다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니원의 쾌락이 안온하고 항상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해탈이니, 소멸해 다하는 것

 

 

[99 / 210]

이 아니니라. 그 해탈자가 곧 여래이니라.”

그때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나지도 아니하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 곧 해탈이며 여래이옵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선남자야, 생기지도 아니하며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 곧 해탈이며 또한 여래이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허공의 성품이 생기지도 아니하며 일어나지도 아니하니 또한 여래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구경의 해탈은 허공과 같지 않느니라. 또 선남자야, 가릉빈가 및 명명조(命命鳥)와 같이 그 소리가 맑게 사무치는 것이 어찌 올빼미와 같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소리가 각각 달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여래께서 방편으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고하였다.

옳고도 옳도다. 음성의 매우 깊은 뜻을 잘 아는구나. 이렇기 때문에 해탈이 곧 여래며 그 여래가 곧 해탈이니라. 그 해탈은 비유할 수가 없느니라. 모든 천상과 세상 사람들 그리고 아수라 등 일체가 비유 아닌 것으로 비유할 수 없느니라. 오직 여래만이 교화할 자를 위하여 능히 방편으로 말하여 비유 아닌 것으로 비유하여 해탈을 말하여 비유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해탈자가 곧 여래며 여래가 곧 해탈이다. 둘이 없으며 다름이 없으니 이른바 비유 안 되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니라. 얼굴이 보름달과 같으며, 그 큰 흰 코끼리가 마치 설산과 같다 하듯이 모든 부처님세존도 또한 그러해서 모든 비유 안 되는 것을 말하여 해탈에 비유하느니라.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법을 말하고 실제법을 말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 때문에 두 가지로 법을 말씀하십니까?”

 

 

[100 / 210]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부처님 처소에서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문득 칼로써 여래를 해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아프다는 생각이 없다. 어떠하냐? 선남자야, 저 사람이 마땅히 무간죄를 이루겠는가?”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기르는 몸에 상해하여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무간죄가 없나이다. 여래는 기르는 몸이 없으며, 자재한 법신일 뿐이니 어떻게 상하게 하겠습니까? 그가 마음으로 나쁜 방편을 내었기 때문에 무간죄를 얻나니 이 이름이 방편법이며, 성질이 진실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구나. 선남자야, 내가 말한 법도 또한 그러하니라. 또 선남자야, 만약 어떤 악한 사람이 그의 어머니를 해치려 할 적에 그 어머니가 알고 나서 본래 있던 곳을 멀리 떠나버리면 그 사람이 알지 못하고 본래 있던 곳에 와 칼과 몽둥이질을 하여 이미 죽였다 하나 그 실은 죽지 않았느니라. 어떠하냐? 선남자야, 이 사람이 어찌 무간죄를 얻지 않겠느냐?”

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죽이는 일이 이루어졌다면 무간죄이지만 이제 그의 어머니가 5음과 6근에 상해를 입어 손상된 바가 없으므로 무간죄가 아닙니다. 마땅히 무간죄와 상사한 과보를 얻을 뿐이니, 또한 무간은 방편법의 진실일 뿐이옵니다.”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잘 응하고 응하지 않는 방편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인연이 있는 까닭으로 해탈을 말하며 인연이 있는 까닭으로 널리 모든 비유를 말하나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이름이 니원이며 또한 여래이니라. 이것이 곧 저 대반니원에 나아가는 것이니, 오늘 여래가 마땅히 니원에 들어감은 이러한 뜻이므로 대반니원이라 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101 / 210]

세존이시여, 이것이 여래가 멸진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오니, 마땅히 여래의 수명이 다함이 없는 줄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바른 법을 보호해 지니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의심을 없애고 결정적인 지혜를 배워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잘 방등반니원경을 설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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